소설

잠들지 못해서 죽는 유전병

잠들지 못해서 죽는 유전병 대표 이미지

잠을 잘 자고 싶어요

내게 유전병이 있다는 사실을 엄마는 어느날 갑자기 알려주었다. ‘자, 너도 알 때가 되었다’라든가 ‘실은 네게 말해줄 것이 있단다’같은 서두는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그저 지나가듯이, 그러고보니 그런 일이 있었지 하는 식으로 문득 말한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그것은 병에 대한 이야기였고, 흘리듯 말한다고 해서 흘려보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우리는 장을 보고 오는 길이었다. 집 근처엔 대형마트도 하나 있었지만 아무래도 시장이 더 가깝고 쌌기 때문에 우리는 보통 시장에서 조금씩 장을 보았다. 파 한 단, 양파 한 바구니, 고구마 한 박스에 피자빵 하나 뭐 이런 식으로. 그런데 그날은 장보기 목록이 자꾸만 길어져 장바구니로 쓰는 에코백이 도저히 버티지 못할 때까지 물건을 샀다. 엄마는 야채 가게에서 콩나물 박스를 얻어다 물건을 옮겨 담았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앞서 걸어갔다. 나는 팥과 렌즈콩과 지갑을 쑤셔 넣은 에코백을 양팔로 감싸 안은 채 엄마의 뒤를 따랐다. 그때 횡단보도 앞에서 엄마가 말했다. 너한테는 유전병이 있어.왜? 하고 나는 물었다. 좋은 질문은 아니었다. 왜인지는 엄마도 모른다. 부계 유전이라고 엄마는 서슴없이(내겐 그런 식으로 들렸다) 말을 이어나갔다. 부계 유전이야. 네 할아버지랑 삼촌들도 잠을 못 자서 죽었어. 네 아빠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니까 제외한다고 치고. 그런데 걘 그런 걸로 죽지는 않았을 거야. 교통사고나 추락사면 또 모를까. 아니면 뭐 한다고 또 바다 밑에 들어갔다가 못 나와서 죽었을 수도 있고…. 나는 아니 아니, 하며 고개를 젓고 엄마의 말을 끊었다. 잠을 못 자서 죽었다고? 그러자 엄마는 시큰둥하게 으응, 하는 소리를 냈다. 다시 아빠의 이야기로 돌아가기 전에 나는 이어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잠을 못 자서 죽는다니? 말 그대로지 뭐. 사람은 잠을 못 자면 죽어. 옛날에 전쟁 포로들을 그렇게 고문했다잖아. 잠들라치면 와악 하고 깨우고 잠들라치면 깨우고. 그럼 버티는 사람이 없었대. 못 버티면 어떻게 되는데?털어놓는거지 비밀을. 그 다음에는?빵! 하고 엄마는 입으로 총 쏘는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비밀을 털어놓으면 총을 맞아 죽고, 끝까지 털어놓지 않으면 잠을 못 자 죽는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게 유전병이랑 무슨 관련이 있지? 병은 전쟁이 아니다. 만약 내게 정말로 유전병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나치 장교나 일본인 순사의 얼굴을 하고 있진 않을 것이다. 나의 비밀도 필요로 하지 않으리라. 엄마의 설명엔 조금 뒤틀린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나는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아무튼 사람이 잠이랑 싸워서 이길 수는 없어. 엄마는 말했다. 죽을 때까지 잠을 못 자면 그대로 죽는 거야. 그러니까 평소에 잘 관리해서 잠이 달아나지 않도록 해. 운동도 하고 식사도 잘 챙기고. 어쨌든간에 너한테는 그런 유전자가 있으니까. 신호등이 녹색불로 바뀌었다. 엄마는 이번에도 앞서 걸었다. 유전병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라는듯 씩씩한 걸음걸이로. 나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횡단보도를 건너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는 순간에도 침대 맡에서 와악 와악 소리를 질러대는 남자들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 뒤로 뭔가 달라졌느냐 묻는다면 딱히 그렇지는 않다. 나는 회사를 그만두지도 않았고 돌연 따뜻한 남쪽 섬으로 가 서핑이나 다이빙에 몰두하지도 않았다. 실의에 빠져버리지도, 병의 예방을 위해 일상의 즐거움을 희생시키거나 이것저것 찾아먹지도 않았다. 엄마의 조언대로 약간의 운동과 식이조절을 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병 때문이라기보다는 늘상 하는 다이어트 때문이었다. 애초에 잠을 자지 못해서 죽는 병에 예방책이 있기는 할까? 엄마가 토막토막 내놓는 정보들을 종합해 봤을 때 나의 유전자에 도사리고 있는 병이란 결코 상식적인 놈은 아닌 듯했다. 암은 적어도 대화가 통하는 병이다. 운동과 식이 조절과 무슨 항암 효과가 있는 버섯 따위를 협상 테이블에 올려두면 그쪽에서도 그에 걸맞는 반응을 돌려준다. 병의 진행을 늦추거나 심지어 예방한다는 식으로. 그러나 나의 유전병에는 협상의 여지가 없었다. 그것은 때가 될 때까지 조용히 피를 타고 흐르다가 어느 순간 마음먹은 듯 발현되어 조상들의 목숨을 빼앗아갔다. 왠지 잠이 안 오네, 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예외는 없었다. 늦든 빠르든, 채식주의자든 운동부족이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은 상황에 따라 달랐으나 결국 잠을 못 자서 죽는다는 점은 모두가 같았다. 나의 할아버지의 경우 불면에 좋다는 귀비탕을 평생 하루 한 포씩 먹었는데, 말년에는 뜬 눈으로 열흘간 버티다 눈을 감았다고 했다. 그래도 할아버지가 된 다음 죽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영 효과가 없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나의 생활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내킬 땐 언제나 빵에 버터를 듬뿍 발랐고(밤마다 후회하기는 했다), 일주일에 두 번쯤 술을 마셨다. 언젠가 함께 술을 마시던 친구에게 병에 대해 털어놓은 적이 있는데 그는 그것을 무슨 대결 신청처럼 받아들였는지 자기한테도 유방암 가족력이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매년 검진을 받는다고도 덧붙였다. 나는 검진이 안 돼. 그냥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잠이 안 오면 죽는 거야. 나는 말했고 친구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럼 평소에 조금씩 아껴서 자. 어느 날 잠이 모자라면 꺼내 쓸 수 있도록. 그러자 다른 친구가 불쑥 끼어들었다. 평소에 잘 자는 연습을 해 둬야 중요한 순간 잘 잘 수 있는 거 아니야? 잠에 대한 견해란 이렇듯 사람마다 달랐다.

어쩌면 그다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는 좀전에 말한 것처럼 할아버지가 되어 죽었다. 아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삼촌들은 아직 절반은 살아있었다. 나머지 반 또한 오십대를 넘겨 죽었다. 다른 병마와 비교해 평범한 타율이다. 치사율이 백 퍼센트라는 점이 약간 문제가 되기는 하지만…. 지금 시점에 상상해보기엔 너무 먼 미래의 일 같아서,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묘하게 전래동화같은 분위기 때문에 나는 내게 있다는 유전병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만약에 언젠가 잠이 찾아오지 않아도 내겐 돌파구가 있으리라 막연히 짐작했던 것 같기도 하다. 전래동화에는 주인공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나는 자연스럽게 나를 주인공으로 간주하는 버릇이 있다. 자만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 텐데. 시한부 선고를 받은 선배들을 참고해 하루하루를 좀더 충실하게 살아가야 했을 텐데. 아니면 할아버지처럼 귀비탕을 먹는다거나 서둘러 요가를 시작해야 했다. 이제 와서 후회하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내 몫의 불면은 이미 시작되었다.

나의 경우 그것은 시나브로 찾아왔다. 회사 일이 바빠 9월부터 야근을 했다. 매일 열 시를 넘겨 집에 들어갔고, 어쩔 땐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씻으러 들를 때도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을 사니 잘 땐 깨어있는 것 같았고 깨어있을 땐 자는 것 같았다. 토요일엔 간혹 잔업을 하러 회사에 가야 했지만 일요일엔 쉬게 해 주었기에 우리는 일요일마다 일주일치 잠을 몰아서 잤다. 우리란 물론 회사 동료들이다. 회사 일을 혼자서 하지는 않기에. 주말에 뭐 했어요? 하고 정 대리는 물었다. 피차 사정은 뻔했지만 그냥 묻는 것이었다. 나는 느릿느릿 밥을 우물거리며 빨래를 하고 냉장고를 정리했다고 답했다. 그리고 산책을 했고 예전부터 팔려고 내놓았던 전자렌지를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서 직거래를 했다고. 역시 천천히 반찬을 헤집던 정 대리가 뭐 많이 했네요, 하고 감탄했다. 저는 하루종일 잤는데. 나 역시도 그랬다고 판에박힌 대답을 하려다가 말문이 막혔다. 나는 종일 자지는 않았다. 그저 졸렸을 뿐이다. 연이은 야근에 몸이 익숙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나 그럭저럭 살아가잖아. 얼음 위에 집을 짓고 썰매를 끌면서도 살잖아. 수면 부족에도 익숙해져서 약간 피곤한 상태로 집안일을 해치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그렇게 10월이 갔고 11월이 왔다. 잠의 총량은 비슷하거나 약간 적었다. 정확한 건 아니다. 매일매일의 야근량이 달라 집에 들어가는 시간도 달랐으므로 굳이 헤아려보지는 않았다. 옆 자리 동료에게 어제 몇 시간 잤어요? 하고 물은 다음 그가 어림하는 시간을 내 수면 시간으로 삼으면 대충 통계가 나올 것이었다. 너무 적었지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두 달 간 혹사당한 우리는 너무나도 피곤해서, 그야말로 아무데서나 엎어져 잘 수 있을 지경이었다. 내겐 원하면 잘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주말에는 평소보다 약간 더 잤다. 주말에 뭐 했어요? 월요일 점심 즈음 동료들에게 물어보았을 때 엄마 생신이라 외식을 했다는 대답이 끼어있으면 기뻤다. 그러나 나는 잠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면적을 좁혀가고 있었다. 늘 그 경계에 서 있었기에 짐작하기 어려웠을 뿐이다. 나는 언제나 절반쯤 잠들어 있었다. 마치 국경선 근처에 사는 사람처럼, 잠을 잘 땐 잠깐 저쪽으로 갔다가 일을 할 땐 다시 이쪽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주소지를 어디에 두느냐는 건 시급한 문제가 아니었다.그날도 나는 열두 시 넘어 집에 들어가 침대에 드러누웠다. 평소라면 먼지 묻은 외출복으로 침대를 더럽히는 대신 욕실로 향했을 테지만 그날따라 너무 피곤했다. 배도 무척 고팠다. 그런데 냉장고엔 아무것도 없었다. 몇 주 전에 썩은 채소와 반찬들을 싹 내다 버린 뒤로 채우지 못했다. 어차피 요리할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뭔가 배달시키고 기다리는 동안 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아득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메뉴를 고르다 두어 번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다 집어치우고 잠이나 자기에는 너무 배가 고팠기에 결국 햄버거를 주문했다. 씻고, 문 앞에 놓인 햄버거 봉투를 가져와 상을 차리고, 먹고, 치우고, 자다가 토하지 않을 정도로 소화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닌텐도를 좀 두드려보고, 결국 게임을 할 기력이 없음을 깨닫고, 불을 끄고 눕자 두 시였다. 그럼 오늘은 네 시간은 잘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섰을 때, 잠의 경계에서, 그는 흘리듯 말했다. 바로 잠들 수 있다면 말이지.

그는 나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대체로 그렇다는 말이다. 실은 그에게는 정해진 형태가 없는 듯하다. 평소에, 그러니까 그의 형태가 중요하지 않을 땐 나와 같은 얼굴과 몸집을 하고 있다가 문득 인지하는 순간 모습을 바꾼다. 그러니까 그는 결코 정면으로 볼 수 없는 시야 바깥의 점 같은 것이다. 혹은 눈꺼풀 안쪽의 무늬. 눈을 감았을 때 보이는 온갖 색채의 무늬들 말이다. 그나마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그의 피부색이다. 그는 약간 어둡게 보인다. 색소가 더 많은 느낌이라기보다는 그가 있는 곳만 조도가 살짝 낮은 듯한 느낌으로. 그외에는 나와 똑같다. 누구나 그를 보면 나의 음울한 쌍둥이 동생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동생인 이유는 그가 보통 내 뒤에 있기 때문이고, 명도의 차이 탓에 약간 작아보이기 때문이다. 그를 발견했을 때 나는 놀랍게도 소스라치지 않았다. 좀 이상한 문장이기는 한데, 실제로 그랬다. 내 침대에 누워 나를 마주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면 보통은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잠의 경계에 있었고, 그곳에선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었다. 꿈을 꾸면서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안다거나. 요컨대 나는 그를 나의 꿈이라고 생각했다. 반 정도는 맞아. 그는 말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 내가 직접 찾아올 수밖에. 너는 내 유전병이구나. 나는 깨달았다. 반 정도는 맞아. 그는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나머지 반은? 나는 물었다. 물론 잠이지. 그는 말했다. 나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꿈이라서인지 이해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나의 귀 부근을 아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러다 애틋한 미소를 짓곤 내 입술에 자신의 것을 포갰다. 키스의 감촉은 실제와 같았고, 심지어 따뜻하고 축축하게 느껴졌다. 와 이거 정말로 진짜같네.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신기해했다. 잠을 자야지. 그가 권했다. 나는 자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말했다. 반 정도는. 하지만 나머지 반은 깨어 있어. 그래서 나는 이렇게 되어버렸어. 그는 왠지 교태를 부리며 말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어버렸다’는 표현이 왠지 성적인 것처럼 들릴 만큼. 사람은 잠을 이길 수 없어. 나는 의미없이 말했다. 나를 봐. 그는 이렇게 말하며 내 손을 이불 속에서 감싸쥐었다.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단 말야. 네가 자지 않으면 나도 잘 수 없어. 확실히 그의 말은 성적인 어조를 띠었다. 아닌게아니라 그는 달아올라 있었다. 눈빛은 흥분으로 흐렸고 숨은 끈적했다. 왜인지는 몰라도 나도 그에게 맞춰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에서는 원래 이상한 결정을 내린다. 그가 이불 속에서 (당연히도)가상의 음경을 꺼내 어루만지기 시작했을 때 망설임 없이 동참한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음경은 입술처럼 따끈따끈했다. 그리고 이상적인 모양과 크기를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협동 수음을 했다. 뭐라고 불러야 할 지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그를 도우려 애썼고, 그가 만족스러워보여 기뻤다. 그는 점점 거대해지는 음경을 열정적으로 문지르다가도 내게 키스하거나 젖꼭지를 살짝 꼬집는 등 유희를 제공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즐거웠느냐 하면, 실은 그랬다. 살면서 해 본 그 어떤 섹스보다도 만족스러웠다.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거리낌없이 몰두할 수 있었다고나 할까. 꿈은 참 좋지? 그가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물었다.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더 설명하려 했지만 필요 없다는 사실을 곧바로 깨달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는 훤히 알고 있다. 생각이 솟는 우물 같은 것이 있고 우리 둘 다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은 방해가 될 뿐이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내 옆에 없었다. 그가 다녀간 흔적은 기억과 속옷 안쪽에만 남아 있었다. 아침 햇살이 건조한 눈길로 방 안을 훑었다. 이미 두 개의 알람을 놓쳐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나는 부리나케 욕실로 뛰어들었다.

잠과 현실 속에 동시에 존재하는 게 가능한가.최근 몇 주 간은 가능했다. 흉작이 든 해의 중세 농노처럼 나는 잠에 굶주리고 있었다. 매일밤의 짧고 얕은 잠이 나머지 시간을 지탱했다. 수면량은 꾸준히 줄었고, 질 또한 형편없어져 한동안 숙면을 취하지 못했다. 잠과 현실의 경계에서, 나는 대체로 무언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대부분 내일 할 일에 대한 계획이나 눈을 붙이기 위해 쑤셔 넣은 쓰레기같은 정보들에 대한 생각이다. 거래처 휴가 일정이나, 복슬복슬한 강아지 영상이나, 나랑 관련 없는 외국 배우가 했다는 역시 나랑 관련 없는 명언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어느 순간 뇌쪽에서 스위치를 내려버린다. 쓸데없는데 에너지 낭비하지 말고 이제 그만 자라는 것처럼. 그러나 생각은 계속 달려나가려 하고, 뇌는 맥락없는 이미지들을 보여줘가며 그것을 방해한다. 그 중간의 나는 재판관처럼 깨어 있다. 꿈지럭거리며 나아가는 생각과 뇌가 보여주는 잠의 환상을 동시에 바라본다. 그리고 깨닫는다-지금 나 자는 동시에 깨어 있네. 그러나 모든 싸움에서 그러하듯, 잠은 끝내 승리를 거둔다. 깨어나기 직전은 언제나 암흑이다.그 암흑 속이 그의 집이다. 원래대로라면 그래야 했다. 처음 나타난 날 이후 그는 불규칙적으로 내 꿈을 드나들었다. 처음에는 나쁘지 않았다. 함께 하는 수음도 즐거웠고, 농밀한 음성이 곁들여진 애무도 기분 좋았다. 그는 언제나 딱 알맞은 부위를 알맞은 타이밍에 만질 줄 알았다. 일일이 설명할 필요 없이 저절로 제공되는 편리한 쾌락에 나는 약간 중독되어 버린 것 같기도 했다. 그가 내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도 꿈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가 된 건 그 밖에서의 일이다. 어느새 그는 꿈 밖으로 나와 있었다. 모처럼 출근하지 않았던 토요일에, 느지막이 침대에서 기어나와 양치질을 하고 있는데 여전히 이불을 둘러멘 그가 보였다. 나는 샐러드를 배달시키려다가 문득 쟤도 아침을 먹으려나 생각했다. 뭔가 먹기는 하나? 사람처럼 제때 영양 공급을 해주어야 하나? 그러나 곧이어 더 중요한 의문이 일었다. 쟤는 언제부터 저기 있었던 거지?기억을 되짚어보니 그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던 장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게 꿈 속의 일이었는지 아니면 현실이었는지 분명치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공포스러웠다. 이제 어떻게 하지? 꿈에서는 어떻게 할 필요가 없다. 현실적인 문제는 꿈의 경계를 넘어가지 못하니까. 물론 꿈의 문제도 현실의 경계를 넘어오지 못할 줄로만 알았는데. 그가 이불 속에서 기지개를 켰다. 지독하게 현실적인 기지개였다. 마침 해도 가장 현실적인 높이에 걸려 있어서, 어질러진 방 안이며 모공에 고인 기름 한 방울까지 빠짐없이 비추어냈다. 꿈의 윤기를 휘감지 않은 그는, 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나는 중얼거렸다. 큰 따옴표가 붙어버릴 만큼 크게. ‘안 되는 건 없어.’ 그는 여전히 꿈결처럼 속삭였다. 작은 따옴표가 붙는 작은 소리로.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대체 어떻게?” 나는 정신이 빠진 듯한 소리를 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칫솔에서 거품이 흘러내려 머리칼에 묻었다. 그것을 손으로 걷어내고 얼른 입을 헹구었다. 거울 속 나는 벌겋고 얼룩덜룩해보였다. 현실적인 안색이다. “언제부터?”그러나 그는 촛불 아래에 있는 것처럼 느끼한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언제부터냐고, 언제부터. 대체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건데? 왜?”‘함께 하고 싶어서.’“그러니까 왜!”‘잠을 자지 않으니까.’“내가 안 자고 싶어서 안 자냐?”그가 연극적으로 입을 벌렸다. 얼굴을 망가뜨리지 않는 선에서 하품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그 모습에 울컥 분통이 터졌다. 저 새낀 내 말은 전혀 안 듣고 있다. 저 작위적인 표정은 뭐란 말인가. 어째서 지금 이 순간에 애교 가득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냐는 말야. 그것도 내 얼굴로. “하아….”한숨이 흘러나왔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해는 높이 떠 있었고, 나의 열 평짜리 자취방은 방음이 좋지 않았다. 창 밖의 먼 곳에서 생선 파는 트럭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제주산 은갈치 오늘만 특별 가격으로 모십니다 반복되는 녹음 멘트가 조금씩 가까워지다 마침내 건물 근처에 멈추었다. 이불이 수상쩍게 들썩거렸다. 그다지 감출 의도도 없는 듯 그가 야릇한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한없이 반복되는 은갈치 트럭의 TTS음성과 신음 소리를 동시에 들으며 나는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저 빈둥거렸다.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이불로 몸을 감싼 채 침대 위에서 흐느적거리거나, 갑자기 자위를 시작하거나(하지 말라고 호통을 쳐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없어졌나 싶으면 어느샌가 찬장을 열어 과자를 꺼내 먹고 있거나 할 뿐 뭔가 사악한 의도가 담긴 듯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사고의 흐름은, 너무나도 예측 불가능했다. 그의 행동에 일일이 당황하느라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힐 시간이 없을 정도로. 혼자 조용히 생각에 잠기고 싶었으나, 눈 뜬 채로 꿈을 꾸는 것처럼, 나는 그저 흘러가는 상황을 힘없이 관망할 수밖에 없었다. ‘같이 자자’고 그는 끈질기게 속삭였다. “해가 중천인데 무슨 잠을 자….”‘세상의 절반은 한밤중인걸. 좋은 꿈을 꾸게 해줄게.’“너나 꿔.”그는 쿡쿡 웃더니 자기 머리를 쓰다듬었다. 문득 진동이 울렸다. 엄마의 메시지였다. <와서 반찬 좀 가져가.>그는 엄마 집에도 따라왔다. 거의 앞장서서 걸었다. 아파트 앞에 도착해 초인종을 누르려 했을 때도 내 손을 부드럽게 쳐내고 제가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 열리는 소리에 놀라 나온 엄마에게 달려들기까지 했다. 나는 그의 목덜미를 잡아 끌어내고 좀 어색한 투로 물었다. “반찬 뭐 있어.”“어, 이것저것. 너 좋아하는 거.”“음.”막 조리가 끝난 듯 아직 김이 피어오르는 반찬들이 식탁 위 뚜껑 열린 밀폐용기 안에서 식어가고 있었다. 버섯볶음, 감자볶음, 장조림, 진미채, 아무튼 각종 볶음과 조림들이. 오이무침도 있어, 엄마가 냉장고를 열며 말했다. “어디 가?” 신선 재료가 싹 빠진 냉장고 안을 넘겨다보며 나는 물었다.“으응.” 엄마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길게 가?”“금방 다녀올거야.”그가 반찬을 손으로 헤집어가며 하나씩 집어먹었다. 엄마가 약간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말리지는 않았다. 나는 조금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는 어디로 가는데. 냉장고까지 싹 비우고.”“…남미에서 네 아빠 봤다는 사람이 있어서 가보려고.”“남미?”“아르헨티나.”“누가 봤다는데 이번에는.”엄마는 또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는 반찬을 전부 맛보고 어느새 과자를 꺼내고 있었다. 쟤는 지네 집도 아닌데 과자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안담? 순간 흠칫했다가, 결국 저것도 나라는 사실을 깨닫곤 납득했다. 내가 이 집에 살았으니 쟤도 이 집에 살았겠지. “커피 한 잔 줄까?”엄마가 나와 그를 번갈아보며 물었다. 나는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결국은, “그러니까 그 사람 뭘 믿고 거기까지 가느냐는 거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잖아. 아르헨티나가 무슨 버스타고 다녀오는 옆 동네도 아니고 제대로 알아본 건 맞냐 이거지 내 말은.”“엄마가 알아서 해.”“엄마가 알아서 할 문제는 맞는데 리스크가 너무 크잖아. 가면 아빠가 기다리고 있대? 애초에 실제로 봤는지 아닌지조차 확실하지 않은데.”“너한테 돈 보태달라고 안 해. 걱정하지 마.”“돈 문제가 아니라, 아니 돈 문제도 당연히 맞는데….”“대출 받았어.”나는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그가 엄마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오늘따라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네.” 엄마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장조림 집에 가져가서 한 번 더 끓여.”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좁은 집에서 간장을 끓이기는 싫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왜 빚까지 내서 찾아다니는 걸까. 그는 여전히 엄마의 무릎을 베고 누워 허벅지를 조물락거리고 있었고 엄마도 그에게 과자를 먹여주거나 하며 아기처럼 다루었다. “나 요새 못 자.” 나는 선언하듯 말했다. ‘나랑 같이 자면 좋을 텐데.’그가 말했다. “병이 왔나 봐. 엄마가 저번에 말한 것처럼.”“아예 못 자니?” 엄마가 물었다. “거의 못 자. 한참 됐어 이런지.”엄마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엄마의 손을 끌어다 깍지를 껴 잡았다. 그게 사랑스럽다는 듯 미소짓는 엄마를 보니 왠지 외로워졌다.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어. 할아버지나 삼촌들처럼 중년이나 되어서야 올 줄 알았는데. 아무튼 이대로라면 나도 머지 않았어. 이렇게 대중없이 오는 병인 줄 알았으면 좀더 즐겁게 살아볼 걸 그랬나봐. 아빠처럼.”“잘 먹어. 아무튼 잘 먹어야 해.”“자는 게 문제지 뭐 먹는 게 문젠가?”“졸리면 자야 하는데 그거 하나를 못 해서.”엄마가 한심스럽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그의 머리를 연신 쓸어넘겨주고 있었다. 그는 엄마의 손길이 만족스러운 듯 제 손가락을 빨더니 바지 안에 집어넣었다. “어머.” 엄마가 나직이 놀란 소리를 냈다. 반찬을 가지고 집에 돌아오니 이미 저녁이었다. 씻고 밥을 먹고 집안일을 조금 한 다음 숨을 돌리면 한밤중일 것이었다. 그렇게 주말 중 하루가 가고, 하루가 더 가면 다시 월요일이 돌아오겠지.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 할 테고 동시에 이 자식 때문에 골머리를 썩겠지. 이미 겪어본듯 뻔한 상황에 나는 벌써부터 피로감을 느꼈다. 피로는 필연적으로 잠을 동반했다. 사람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잠으로 도망치려 하는 법이다. 묵직한 머리를 흔들며 일을 하나씩 해치웠다. 우선 반찬을 정리했고, 샤워를 했고, 장조림을 다시 끓였고, 창문을 열어 환기한 김에 청소기를 돌렸다. 빨래와 건조기도 돌렸다. 이런 일을 하는 게 왜 이렇게 힘이 들까. 생각해보면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일이란 정작 이런 사소한 것들 뿐인데. 나는 내가 회사에서 하는 일이 정확히 몇 인분의 밥으로 치환되는지 모른다. 몇 벌 분량의 빨래로 치환되는지도 모른다. 그런 일들에 하루의 대부분을 쏟아붓고 나머지 시간에만 정말로 중요한 일들을 기계처럼 해치우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사는 게 환멸났다. ‘잠을 자야 해.’ 그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밤이 되자 그의 말은 밤의 광휘를 입어 신빙성을 획득했다. 너는 왜 자꾸 나더러 자라는 거야? 너는 내 유전병이잖아. 결국에는 나를 집어삼킬 거잖아. 그러자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반 정도만 맞아. 너는 암적인 존재야. 너랑 닿는 부위를 썩게 만들어. 감염된 것처럼. 감염이나 부패 같은 게 아냐. 암이랑은 약간 비슷할지도 모르지. 그건 네 유전자 안에 있어. 그거?참을성있게 때를 읽다가, 그 순간이 오면 이자를 받아가지. 나는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알 필요 없어. 꿈에서는 아무것도 알 필요가 없어. 나는 흐느꼈다. 흐느낌은 곧 곡소리가 되었다. 이렇게 울어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무엇 때문에 우는지 알 수도 없었다. 슬픔을 생산해내는 공장이 내 폐 언저리에 있고, 그 생산품을 입을 통해 토해내는 것처럼 나는 꺼이꺼이 울었다. 그는 아주 다정하게 나를 안아주었다. 냉장고의 음식들이 생각났다. 식으면 맛이 없어지리라는 게 걱정이 되었다. 실은 이미 다 식어빠진지 오래되었겠지만 꿈의 논리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황급히 달려가 냉장고 문을 잡아뜯었고, 그 안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요리들을 꺼냈다. 엄마가 해준 반찬들과 언젠가 넣어두었던 맛있는 음식들을. 그리고 식탁에 둘러앉아 먹기 시작했다. 꿈의 원료는 언제나 현실이야. 음식을 한 숟가락씩 떠서 내게 먹여주며 그가 말했다. 함께 앉아 있었으나 저 자신은 하나도 먹지 않았다. 나는 무척 배가 고팠기 때문에 그 사실이 반갑게 느껴졌다. 나는 와구와구 먹었다. 배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먹는 족족 깊고 허무한 공동으로 떨어져 결코 채워지지 않는 것처럼 포만감은 없었다. 너무 갑작스러워. 한심스러워. 기막혀. 나는 먹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약속한 것처럼 섹스가 시작되었다. 그게 그렇게 되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성욕이 센 편도 아닌데, 나는 생각했다. 전혀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돈데. 누군가를 필요로 하지도 않고, 살을 맞대며 살지 않아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데. 아주 가끔씩 그런 기분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런 건 참을 수 있어. 나는 말했다. 먹지 못하면 죽지만 사람을 사귀지 않는다고 죽는 건 아니잖아. 사귈 필요 없이 몸만 주고받고 끝내는 건 도리어 깔끔하지 못한 것 같아 안 끌리고 말이지. 나는 그 정도로 굶주리지 않았단 말야. 내가 주절거리는 동안에도 그는 성실하게 내 몸 여기저기를 핥고, 깨물고, 붙잡고, 튕기고, 문지르고 있었다. 기막혀 정말….너는 숨기는 게 너무 많아. 뭐라고! 나는 벌컥 화를 냈다(그 순간 떠오른 것은 겨드랑이 밑에 난 뾰족뾰족한 털의 이미지였다). 모든 걸 내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의 뺨을 갈기고 소리를 지르며 울고 싶었다. 잘 되지는 않았다. 내 주먹은 물살을 휘젓는 것처럼 느리게 움직였다. 나는 손톱을 세워 그를 할퀴었고, 그 다음엔 달렸다. 참 맥락없는 각본이었다. 어느 순간 나와 함께 달리던 그가 아빠의 얼굴을 하고 나를 안았다. 꿈에서조차 그것은 불쾌하게 느껴졌다. 내 꿈인데, 나는 울분을 터뜨렸다. 내 꿈인데 어째서 내게 이런 짓을 하는 거야. 그는 나를 달래주지 않았다. 그저 자기가 할 일을 할 뿐이었다. 여전히 아빠의 얼굴을 한 채로. 너무나도 불쾌한 감촉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꿈의 이쪽 끝이,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모를 긴 축의 한켠이 불온함을 감지하고 가늘게 떨렸다. 반대편 끝은 언제나처럼 침묵하고 있었다. 꿈의 원료는 언제나 현실이다. 나는 아빠의 머리를 세게 깨물었다. 그것은 케이크처럼 저항 없이 썰렸다. 머리카락이 이 사이를 파고들었다. 샴푸의 엷은 향과 피지가 섞인 냄새가 났다. 앞니를 밀어넣자 두피가 입천장을 구르며 벗겨졌다. 두꺼운 과일 껍질을 이로 벗길 때처럼. 나는 아빠의 정수리 부근을 그렇게 벗겨낸 다음 불쾌감에 침을 뱉었다. 그래도 질긴 머리카락 몇 올이 입안에 남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다음에는 코를 물었다. 그것은 기름에 절인 것처럼 미끄러웠다. 도저히 씹어 삼키기는 싫은 식감이라 퉤 뱉어내고 입술과 어깨를 깨물었다. 차례차례, 능숙한 육식 동물처럼 모든 부위를 한 입씩 베어물자 아빠의 몸이 처졌다. 바람이 빠져나가 거죽만 남았다. 동강난 하반신에서 기름 같은 것이 새어나왔다. 끈적해보이는 하얀 지방 덩어리가 툭툭 떨어지고, 그보다 약간 투명한 액체가 흘렀다. 나는 그의 상반신을 열어젖혀 갈비뼈 사이에서 작고 말랑말랑한 덩어리를 끄집어냈다. 이게 바로 우리의 병이구나. 나는 말했다. 덩어리는 검었다. 큰 짐승의 심장처럼 느리게 뛰고 있었다. 축축했고, 어느모로 보나 먹음직스럽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나의 운명이다. 아니, 운명이라기보다는 스케쥴 같은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것을 먹기로 되어 있다. 별로 내키지는 않더라도. 덩어리는 검었다. 어떤 의지도 없는 것처럼 검었다. 그것을 먹어버리는 건, 비록 정해진 일이라도 매우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다. 애초에 잘못된 규칙을 따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고민했다. 덩어리 안을 들여다보려고 애썼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결정해야 할 시간이었다.알람이 울리고 있었으니까.

🎵

일요일에는 알람이 없는데. 나는 생각했다. 순간 요일을 착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긴 축의 저쪽 편에서 의식이 다가오고 있었다. 손바닥 위에는 덩어리가 있었다. 냄새도 기척도 없는 그저 작은 어둠의 덩어리였다. 잠시 망설이다가, 나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려 한 입 깨물었다.

새벽 한복판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다시 잠들 수 없음을 알았다.

이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복제, 배포, 전재 및 재가공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