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유감

혹시 알지만 몰랐던 것이 있으신지요? 개인적으로는 빠다코코낫이 버터+코코넛이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저 빼고는 다 알고 있었더군요. 또 눈, 코, 귀, 뼈, 무릎, 어깨, 털, 배꼽처럼 몸을 부르는 이름들은 대부분 순우리말이라는 거랑 사각지대의 사는 죽을 사死 자를 쓴다는 거랑....
여자가 성을 바꾼다는 건 대체로 둘 중 하나다. 엄마를 따르기로 했거나 남편을 따르기로 했거나. 두 부류 사이에는 결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는 듯하다. 나의 경우엔 도주중이었으므로 둘 중 어느 쪽도 따를 수 없었다. 꼬리가 잡힐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선택해야 한다면 누구를 고를 것이냐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애초에 나는 한국인이고, 한국에서는 결혼을 하더라도 성을 바꾸지 않는다. 이런 것이다. 길고 깊은 강줄기를 사이에 두고 좌측엔 엄마 성을 따른 여자들이, 우측엔 남편 성을 쓰는 여자들이 모여 산다. 거기서 버스를 타고 삼십 분쯤 가면 댐이 있고 저수지가 있다. 댐 아랫마을이 우리 외갓집인데, 사는 게 바빠 명절에도 들러보지 못한 게 두 해쯤 되었다. 올해 추석에는 꼭 할머니를 뵈러 가야지 다짐하지만 솔직히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아, 나는 서울 모처의 원룸에 산다. 귀화하여 창씨를 한 외국인을 이웃으로 두고 있다. 참고로 나는 미혼이다.
성을 바꾸기로 한 건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내 이름은 ‘서연’으로, 동년배 중엔 가장 흔한 이름이다. 과장 조금 보태 발에 채일 만큼 흔한 듯싶다. 중학교 땐 같은 학년에 무려 일곱 명의 서연이 있어 모두 공평하게 별명으로 불렸을 정도였다. 고등학교 땐 상황이 조금 나아져 다섯이었으나 여전히 ‘박서연’내지는 ‘박서’정도로 불렸다. 아무튼 서연은 잃어버리기 쉬운 이름이다. 그렇다면 굳이 이름까지 바꿀 건 없겠지. 심사숙고 끝에 도달한 결론은 이러했다. 잃어버리기 쉽다는 건 다시말해 잊어버리기도 쉽다는 뜻이리라. 이왕 흔한 이름을 타고난 거 이런 식으로라도 이익을 얻는 게 낫지 않을까? 이름 석 자를 다 바꾸는 대신 성만 갈아치우는 게 훨씬 경제적이기도 하다. 어떻게 생각하면 오히려 안전할 수도 있다. 도대체 어떤 도주자가 이름은 두고 성만 바꾼다는 것인가. 그리하여 나는 박서연이 아닌 지서연으로 살아가는 중이다.
바꿀 거면 좀 흔한 걸로 하지 왜 하필 지 씨야?
하고 그는 물었더랬다. 언뜻 일리 있는 지적처럼 보인다. 바로 그 점이 문제다. 당신이 상식 있는 사람이고, 다음과 같은 주문을 받았다면 - 김, 이, 박, 정, 최, 강, 지서연 중 도주 중인 서연을 고르시오 -아무래도 김서연이나 이서연을 지목하지 않겠는가. 지 씨는 그런 점에서 괜찮은 선택이다. 인구 수는 적되 인상은 흐릿하다. 발음도 매끄럽다. 지서연하고 발음해보면 홍서연이나 신서연을 부를 때보다 호흡과 힘이 덜 필요하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지서연은 입에서 힘 없이 떨어져버린다. 몸의 작용을 최대한 덜 이끌어내야 기억에도 오래 남지 않는다. 앞 문단에서 호출해버린김에 그에 대해서도 몇 마디 해볼까 싶다. 그는 나의 안마사로서, 맹인이다. 안마 실력은 그저 그런 편이지만 믿을만하다. 사실 도주자에게 맹인 안마사는 좋은 친구다. 그들은 대체로 입이 무거운데다 몽타주도 못 그리니까. 열심히 그려봐야 검증이 안 되니 어쩔 수 없다. 이건 매우 차별적인 발언이므로 도주자가 아니라면 입에 담지 말기를. 나는 한 번 된통 혼난 적이 있다. 또 안마는 몸과 정신 양방향에서 도움이 된다. 사람이란 어느정도는 다른 사람의 살을 만지고 또 만져져야 하는 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체내의 무언가가 망가져버리고 만다. 오랜 관찰과 경험을 통해 습득한 지식이다. 나는 사람과의 접촉을 갈망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 필요성 자체는 인지하고 있기에 주기적으로 타인과 살을 맞대려 한다. 몸과 정신을 현실에 붙들어두기 위해서라도 그런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주로 목요일 오후 네 시에 안마원을 찾아 그를 지명한다. 그 시간대에는 예약을 하지 않고도 바로 안마를 받을 수 있다. 드물게 손님이 있는 날엔 대기 명단에 이름을 적지 않고 뒤돌아 나간다. 한 주를 건너뛰어 찾아가면 반드시 허리가 굳었다는 말을 듣게 된다. “꼭 안마를 받지 않더라도 평소에 조금씩 허리를 풀어둬야 해요. 근육이 경직되면 일을 그르치니까. 스트레칭은 하세요?”생각날 때마다 비틀어주고 있다고 답하면 그는 비틀기만 해선 안 된다고 말하며 지압을 이어나간다. 비틀기만 해선 안 된다. 비틀어서 버텨야지. 신기하게도 그의 손이 지나가면 내 허리가 어떤 모양으로 휘어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 나는 가벼운 척추측만증을 앓고 있는데, 허리가 아프지는 않다. 아픈 건 오히려 골반과 어깨 쪽이다. “원래 그래요. 척추는 스스로 고통을 부담하지 않아요. 가장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 잠시 제쳐두는 거죠. 고통은 근육을 타고 흘러서 골반이나 무릎, 정강이, 발목으로 내려가요. 그 길을 잘 알아야 고통을 달랠 수 있어요. 가방을 주로 왼쪽에 매나요?”“응.”“오른손잡이고요.”“응. 고통을 완전히 없애려면 척추를 바로잡아야 하나?”“그건 불가능해요. 참고로 어깨가 아픈 것도 몸이 틀어져 있기 때문이에요.”그는 전문가답게 냉정하다. 전문가는 냉정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으므로 재차 묻지 않는다. “내 척추에는 희망이 없군.”“적어도 원래대로 돌아갈 일은 없어요.”주무르고, 주물러진다. 비틀고, 비틀린다. 마사지용 베드에 엎드려 있으면 오직 주물러지고 비틀린 부위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내 척추는 완만한 S자를 그리며 휘어 있다. 아주 예전부터 시작되었던 비틀림이 중력과 시간의 작용에 의해 이제 눈에 띌 만큼 휘었다. 그의 말처럼 그것은 허리를 아프게 하지는 않았으나 살과 근육의 침식을 일으키는 식으로 천천히 몸을 바꾸었다. 몸의 어느 부위에 지방이 쌓이는지, 어느 쪽 다리가 더 쉽게 지치는지 나는 철새의 도래 시기를 기록하듯 매년 확인해두고 있다. 미래를 예측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미래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를 가늠해보는 시도에 가깝다. 그가 양손으로 허리를 감싸고 지그시 압을 주었다. 피부 아래 부드러운 지방층이 빵반죽처럼 눌렸다. 그의 양손 사이가 평소에 비해 조금 넓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살이 붙은 탓이었다. “일부러 찌우고 있어요?” 하고 그가 물었다. “체형을 바꾸려고요?”“평소보다 단 걸 많이 먹고 있어. 근력운동은 평소처럼 하고.”“그런 것 같아요.”“초콜릿 케이크 같은 걸로 끼니를 때우니 운동을 해도 근육이 안 붙어.”“근육은 이 정도면 충분해요.”“습관적인 거야. 쓸 일이 없어도 근육을 괴롭혀두지 않으면 찜찜해서 견딜 수 없어. 매일 머리를 감거나 양치질을 하는 거랑 비슷해. 몸과 마음의 위생을 위해 불가피한 거지.”“몸은 그렇다쳐도 마음의 위생은 뭐예요?”“인간이 매일 이를 닦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생각해?”나는 그가 미소지었다고 생각했다. 얼굴 넣는 구멍에 얼굴을 끼워넣은 채였지만 그런 표정을 본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손이 척추를 타고 올라가 날개뼈 아래의 한 점을 세게 눌렀다. 눈 앞이 아득해질 만큼 아팠다. “차라리 비명을 지르면 몸이 덜 굳어요.” “그것도 습관이야.”한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었다. 그러나 그는 안마를 멈추지 않았다. 평소라면 마무리삼아 온몸을 가볍게 두드린 다음 몸에서 손을 뗄 시간이었다. 지불한 만큼 받는 것이 안마의 기본 원칙이었다. 그 합의가 깨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므로 나는 살짝 당황했다. 근육으로부터 그 사실을 알아챈 것처럼 그는 말했다. “한 시간 다 된 거 맞아요. 그런데 지금 나가봐야 문이 닫혀 있을 거예요. 원장이 우리를 두고 외출해버렸거든요.”“외출.” 나는 막연히 그의 말을 반복했다. “십 분쯤 전에 문이 잠기는 소리를 들었어요. 아마 손님이 있다는 걸 잊었을 거예요. 당신은 늘 워크인으로 들어오는데다 죽은 것처럼 조용하니까요. 오늘은 원장이 치과에 가는 날이니 아마 두 시간쯤 걸리겠죠. 전문 병원에서 신경치료를 받고 있거든요.”“그런 걸 왜 이제서야 말해주는 거야?”“이제 안마가 끝났잖아요.”돌아버리겠네. 나는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소리와 등의 진동을 통해 그도 느꼈을 것이었다. “그럼 그만해.” 내가 말하자 경추를 더듬던 손이 머뭇거렸다. “시간은 끝났잖아. 원장이 돌아와서 꺼내줄 때까지 할 게 아니면 그만둬.”“그러려고 했죠.”“됐어. 세 시간씩이나 여기 얼굴을 넣고 있고 싶지는 않아.”그가 따뜻한 물수건으로 등을 닦아주었다. 물수건에서는 레몬 냄새가 났다. 생각난 것처럼 창문으로라도 나가겠어요? 하고 그가 물었다. 농담인지 진심으로 권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벗은 몸을 일으켜 방 한켠의 캐비넷으로 향했다. 수분이 증발하며 몸을 식혔다. “모르는 것 같아서 말해주는데, 여기 4층이야.” 일회용 팬티를 벗고 가져온 새 속옷으로 갈아입으며 내가 말했다.“알고 있어요.”“난 또 엘리베이터만 타고 다녀서 모르는 줄 알았지. 4층에서 기어내려갈 만큼 급한 일은 없으니 그냥 기다릴게.”“뛰어내리는 게 아니라?” 그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타이밍만 잘 잡으면 그 편이 눈에 덜 띄긴 하겠네.”나는 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스웨터를 집어들었다. 그러나 실내는 덥고 습해서 스웨터까지 입을 필요는 없을 듯했다. 지갑이 든 에코백에 그것을 둘둘 말아 쑤셔넣고, 나는 다시 침대로 돌아가 앉았다. “앉지 그래.” 그에게도 권했다. “여기 있을 거예요?”“그럼?”“로비에 나가 있을 줄 알았어요. 소파랑 잡지가 있으니까.”“함께 나갈 거야?”“나는 여기가 편하죠.”“나도 여기가 편해.”“마음대로 하세요.”그는 새 물수건으로 손을 꼼꼼히 닦았다. 더러워진 수건은 빨래 바구니에 넣고, 미니 냉장고 앞에 쪼그려 앉아 300밀리미터짜리 생수를 꺼내 단숨에 비웠다. 생수병은 그의 손에서 찌그러져 바로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흘끗 넘겨다본 냉장고 안엔 라벨 없는 생수 여섯 병 뿐이었다. 그의 움직임을 보는 것은 새삼스러웠다. 이 방에 들어서 옷을 벗고 침대에 눕는 동안 그는 주로 일할 준비를 마치고 가만히 서 있는 편이었다. 미니 냉장고나 수건 바구니, 작은 책상과 의자를 보는 것도 처음인 듯했다. 방에 비해 큰 가습기가 있다는 인식 뿐 그의 자리를 눈여겨본 적은 없었다. 그는 신중한 사람처럼 느리고 매끄럽게 움직여 책상 앞에 앉았다. 잠시 망설이는 듯싶다가 의자를 돌려 나와 마주보는 자세를 취했다. 내게도 물을 줄 생각은 없는지 궁금했다. “….”침묵이 지나갔다. “…원래도 종종 안마를 받곤 했나요?”“그래.” “근육과 살에 길이 나 있어요. 이런 건 스스로 만들 수 없는 법이죠. 첫 안마사랑은 왜 결별했어요?”“그 안마원에 더 갈 수 없게 되었거든.”“왜요?”“그보다 말을 놓지 그래. 지금은 손님도 아닌데.”“말투가 특이하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어?”“….”다시 어색한 침묵이 지나갔다. 커피라도 홀짝이고 싶었으나 그는 뭔가 대접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생각보다 젊네.” 나는 말했다. “내 얼굴을 보고 있어?”“그래. 언뜻 보고 생각한 것보다 훨씬 젊어. 몇 살이나 됐지? 스물 다섯?”“스물 일곱. 지서연씨 당신도 내 생각보다 젊어. 몸은 엉망인데 근육은 탄탄하거든.”“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지?”“몸은 혹사시킨 만큼 늙어. 근육은 그 반대고.”“일리가 있군.”나는 문득 그가 고개를 젓거나 끄덕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 식으로 대답을 대신하기에 적절한 순간에도 그는 정물처럼 가만히 있었다. “장애는 선천적인 건가?”“세 살때 눈이 멀었어. 아주 어릴 때라 기억나는 건 별로 없지만 꿈은 꾸지.”“앞이 보이면 꿈이라는 걸 알 수 있겠네. 나름대로 편리하겠는데.”“아니. 항상 시력을 되찾았다고 착각하곤 해. 그래서 내 모든 꿈은 악몽이야. 잠에서 깨어나면 다시 시력을 잃어버리니까.”“일종의 트라우마인가.”“트라우마?”“시력을 잃어버린 사건이 외상으로 남아서 뇌가 자꾸 그 순간을 반복해 보여주는 거지.”“일리가 있네. 하지만 뇌가 아니라 현실이 반복되는 거야.”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나는 눈이 보이는 사람처럼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예전 안마사는 완전히 장님은 아니었어.”“그래?”“컨디션이 좋은 날엔 약간은 보인다고 했던 것 같아. 차가 오는지 안 오는지 정도는 알 수 있을 정도라고 했던가. 그런데 그는 장님인데다 색맹이었거든. 그래서 컨디션이 좋은 날에도 신호등을 구별할 순 없었어.”“함께 외출해본 적 있어?”“아니. 그냥 들은 얘기야.”“나는 전혀 안 보여. 하지만 신호등이 빨간색과 녹색이라는 건 아니까 만약 보인다면 구별할 순 있을 거야. 사실 내 꿈은 진짜로 악몽이야. 앞이 보인다는 걸 깨닫고 기뻐하고 있으면 어느샌가 공무원이 찾아와 안마사 자격증을 반납하라고 요구하거든. 자격증은 해 모양의 예쁜 메달인데, 금으로 되어 있어. 나는 그걸 뻬앗기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결국 경찰에 체포되지.”“음,” 하고 나는 듣고 있다는 소리를 냈다. “내 꿈에서 그건 중범죄거든. 장애인주차석에 차를 댔다거나 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냐. 자격증을 반납하지 않으면 사형당할지도 몰라.” “무시무시한 꿈인데.”“그야말로 악몽이지. 그래서 나는 늘 공포에 질려 깨어나.”문득 간지러웠는지 그가 손을 들어 코를 꼬집었다. 젖은 손끝을 티셔츠 자락에 문질러 닦고 다시 깍지 껴 무릎에 올려두었다. 나는 그 동작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혹시 ‘눈 먼 자들의 도시’ 알아?” 그가 물었다. “영화는 봤어.”“난 영화는 못 봤어. 만약 내가 어느날 갑자기 시력을 되찾는다면 정확히 그런 일이 일어날 거야. 살아갈 방법과 자격을 잃고 혼돈에 빠지겠지. 난 장님으로 살아가는 법만 알거든. 남들이랑 공정하게 부딪혀본 경험도 없고.” “후속작으로 ‘눈 뜬 자들의 도시’도 있는데 말야.” “그건 오디오북이 없어서 못 들었어. 난 아는 게 적어. 텔레비전은 뉴스만 보고, 영화나 드라마는 안 봐. 오디오북은 많이 듣는 편인데 텍스트는 꼭 필요한 걸 제외하고는 안 읽어. 손이 피곤해지니까. 그래서 내 지식은 고전문학에 치중되어 있어. 그런 걸로는 아마 남들처럼 살아갈 수 없겠지.”“혹시 특별히 무서워하는 거 있나?” 내가 물었다.“앞이 보이거나 안 보이는 거 말고?”“그래.”“그럼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아, 크고 반복적인 소리가 들리면 불안해. 이건 무서운 것과는 좀 다르려나.”“공포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어. 미지의 공포와 예견되는 공포. 그래서 괴담은 길어질수록 재미가 없고 전기톱은 다가오기 전이 가장 무섭지. 결국 공포란 일어나지 않을 일이기 때문에 공포스러운 거야.”“고마워. 그거 참 위로가 되네.” 나는 그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미소지었다. 그는 보지 못할 미소였다. 혹은 어떤 신비의 작용으로, 예를 들어 시력 대신 발달한 청력이 얼굴 근육 움직이는 소리마저 잡아낸다는 식으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가 말해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내 얼굴을 좀 만져주지 않을래?” 내가 물었다.“얼굴을?”“그래. 사실 나는 지금 도주중이거든. 곧 이 안마원에도 오지 못하게 될 수 있으니 그 전에 당신이 내 얼굴을 만져줬으면 좋겠어. 몽타주는 그리지 못하겠지만 기억엔 남을 거 아냐.” “도주 중이었구나.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일 거라고는 대강 짐작했어.”“아무튼 얼굴을 만져줘. 안마 요금은 지불하지.”“돈은 됐어. 일을 하는 게 아니니까.”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그의 의자 아래 앉았다. 그가 깍지 낀 손을 풀어 앞으로 내밀었다. 한쪽 손에 얼굴을 가져다대자 나머지 한쪽 손이 살며시 머리를 감쌌다. 손끝이 이마를 타고 내려 콧대와 눈썹을 어루만졌다. 그것은 안마를 할 때와 달리 단단했고, 차가웠다. “참고로 나는 꿈을 꾸지 않아.” 내가 말하자 입술을 누르던 손이 따라 움직였다. “단 한 번도?” “그래. 평생 한 가지 꿈만 꾸는 거랑 꿈을 못 꾸는 것 중 뭐가 더 불행하다고 생각해?”“….”그는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손은 멈추지 않았다. 양손바닥을 뺨에 얹고 엄지로 코와 광대뼈의 지도를 그렸다. 역시 프로페셔널 안마사로군. 나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무엇이 우스웠는지 그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그 다음주 목요일에도 나는 안마를 받기 위해 그를 찾았다. 평소와 달리 척추를 거의 부러뜨릴 듯 지압하는 바람에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알고보니 그는 나의 몽타주 이야기에 앙심을 품고 있었다.
도주중의 생활은 간결하다. 생활을 가능한 간결하게 꾸리는 것이 도주의 비결일수도 있겠다. 나의 원룸에는 가구가 없다. 잠은 바닥에서 자고, 옷은 트렁크에서 꺼내 입는다. 주방과 세탁기는 빌트인이다. 비누로 온몸을 씻고 머리를 감는다. 머리를 더 짧게 자르면 편하겠지만 눈에 띄고 싶지 않아 그만두었다. 하루중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이는 것은 운동과 식사다. 나는 식사 만큼은 공을 들인다. 운동은 습관이라 공을 들일 필요까지는 없다. 시간이 되면 하천을 달리고 철봉에 매달릴 뿐이다. 돌아오는 길에 장을 봐 요리해 먹는다. 유기농 식재료를 고집한다거나 영양성분을 따지는 건 아니다. 먹고 싶은 게 생각나면 외식을 하기도 하고 군것질도 한다. 그러니까 최근 부쩍 살이 붙은 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일부러 체형을 바꾸려는 건 아니지만. 안마를 받으러 가는 날 외에는 대체로 그런 식이다. 주기적으로 트렁크를 쏟아부어 내용물을 살핀다. 손질이 필요한 물건은 손질하고, 점검한다. 반드시 가져가야 할 물건이 있는가 스스로에게 묻는다. 없다. 여차하면 트렁크는 버려두고 몸만 빠져나가도 될 것이다. 그래도 웬만하면 총은 가져가야겠지. 미력이나 애착과는 상관 없이 어디에도 둘 수 없는 물건이니까. 나는 싱크대 위에 손질을 끝낸 리볼버를 올려두고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본다. 리볼버가 있는 풍경. 씻어서 엎어둔 그릇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 식기와 요리도구는 원룸 옵션에 포함되어 있었다.
도주 중이라는 사람이 너무 느긋한 거 아냐?
이런 질문이 나올 수도 있겠지. 그러나 느긋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도주란 달아나 몸을 숨기는 과정이다. 일단 멀리 달아난 뒤에는 숨을 죽여야 한다. 조급증에 걸린 인간은 쉽게 눈에 띈다. 아니면 완벽하게 틀어박힐 수는 있겠지.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않고 모든 신체활동을 실내에서 해결하는 것이다. 주기적으로 쓰레기를 수거하고 생필품과 식재료를 가져다 줄 사람이 있으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런 생활은 오래가지 못한다. 믿을만한 조력자를 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운신의 폭이 좁으면 반드시 무언가 쌓인다. 그 빚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갚게 될 수도 있다. 물론 비용도 훨씬 많이 든다.
결국 다 돈 문제네요.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라고 반박하려다가 나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한다. 돈 이야기가 나온 이상 어떻게하든 지는 싸움이다. 하긴 거의 모든 문제의 답은 돈이다. 나는 요즘도 목요일마다 안마원을 찾는다. 여전히 예약은 하지 않고 바로 그의 방으로 간다(몽타주 발언 이후로 시간이 좀 지나 지압은 평소의 강도로 돌아왔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라면 안마가 끝나고도 잠시 남아 그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일 할 땐 존댓말을 쓰다가 한 시간 알람이 울리면 말을 낮춘다. 그는 나의 도주 생활에 대해 궁금해했다. 무엇으로부터 도주하는 것인지. 도주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 잡히면 어떻게 되는지 등등. 커피라도 한 잔 대접하면서 묻지 그래? 하고 핀잔을 주자 그게 바로 맹인의 특권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무도 내게 예의범절을 가르칠 수 없거든…. 오늘은 그러나 다음 타임에 예약이 잡혀 있다고 했다. 떠나라는 뜻으로 알아듣고 신발끈을 매는데, 그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그냥 있어. 안마 하는 동안에도 얘기 좀 한다고 기력이 달리진 않으니까.”그게 문제는 아니지 아니지 않나? 당혹스런 표정을 읽은 듯이 그가 덧붙였다. “다음 손님은 농인이거든. 어차피 못 들으니까 거기 앉아서 나랑 얘기나 좀 해. 심심하단 말야.”“그래도 내가 있다는 사실은 알 거 아냐. 귀가 안 들리는 거지 앞이 안 보이는 것도 아닌데.”“그런 건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니까 괜찮아.”결과적으로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다섯 시 손님인 노인은 내가 침상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도 묵묵히(당연하지만) 옷을 갈아입을 뿐이었다. 어떤 이유가 있어 안마사가 한 명 더 있겠거니 생각하는 것도 같았다. 양해를 구해야 하나 생각했으나 방법이 없어 단념했다. 나는 수화를 몰랐고, 종이도 펜도 없었다. 그와 노인은 어떻게 소통하는 걸까. 나는 노인의 벗은 등을 바라보며 궁금해했다. 그것은 낡은 자루에 잠긴 뼈처럼 보였다. “소통이 안 돼. 그러니까 심심하지.” 노인의 허리를 살며시 누르며 그가 말했다. “그럼 뭘 해야 하는 지 어떻게 알아?”“어디가 아픈지 정도는 사장을 통해 들어서 알고 있어. 그리고 만지다보면 느낌이 와. 내가 뭘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너무 아프다거나 하는 건 몸을 뿌리치는 식으로라도 표현하니까 그럴 땐 압을 조정해.”“오로지 몸의 대화로군.”“너무 집중하게 돼서 안마를 끝내고 나면 진이 다 빠져.”“나도 이제부턴 입을 다물고 있을까.”“내가 계속 말할 거니까 당신한텐 해당 없어.”나는 피식 웃었다. 팔을 뻗어 냉장고 문을 열었다. 심심함을 달래주는 대가로 물을 한 병 훔쳐 마실 생각이었다. “노인은 다 비슷하게 생겼다지만 이 사람은 꼭 내 외조부를 닮았군.”“모르는 사이 환생이라도 한 거 아니야?” 그는 심드렁하게 묻곤 잠시 틈을 두었다. “아직 살아계시나?”“예전에 죽었어. 한 삼천 년 전에.”“외할머니는?”“아직 살아있어. 삼천 년째 과부 생활중이지. 꼬박꼬박 제삿상을 차리면서.”“사이가 좋으셨나 보네. 우리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거든. 그 핑계로 제사를 그만두려고.”“영리하네.” 나는 감탄했다. 기억에 남아 있는 노부부의 모습은 정답다. 그들은 늘 옷을 맞추어 입고 손을 잡고 다녔다. 외조모는 계절에 따라 금비녀와 옥비녀를 바꾸어 꽂곤 했는데, 각각 환갑과 칠순에 외조부가 선물한 것이었다. 몇 가닥 없는 머리를 곱게 빗어 쪽지은 모양은 굵직한 비녀와 대조되어 위태로워 보였다. 둘은 네 살 차이가 났으나 비슷하게 늙었다. 외조부는 자기 아내를 몹시 귀여워했다. 그도 젊을 땐 아내를 곧잘 쥐어패곤 했다는 사실은 나중에 가서야 들었다. 언제였더라, 같은 동네의 한 노인은 젊어서나 늙어서나 단 한 번도 자기 아내를 팬 적 없다는 전설이 먼저였다는 것 정도는 기억이 나는데. 노인이 목구멍을 긁는 소리를 냈다. 겁먹은 개처럼 휘청거리는 신음이었다. 그가 자기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순간 동요했다. “살살해. 그러다 부러뜨리겠어.”농담으로 던진 말이었으나 어쩐지 끝맛이 개운하지 않았다. “좀 아팠나봐. 이 사람 유난히 살이 부드러워. 당신 외할아버지도 그런 편이었어?”“몰라. 만져본 적 없어서.” 나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알고 싶지도 않고.”“어떻게 생겼었어? 이 사람이랑 비교해서 말야.”“음…. 덩치가 더 컸어. 머리는 백발이었고, 이가 하나밖에 없어서 틀니를 꼈어.”“발음이 샜겠네. 가뜩이나 노인들 말은 알아듣기 힘든데.”“나도 거의 못 알아들었어.”“또? 어떤 사람이었어?” 그가 노인의 허리를 양손으로 누르며 물었다.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잘 몰라. 생김새밖에는. 젊었을 땐 제법 미남이었다고 했는데, 그것도 직접 못 봤으니 사실인지는 모르겠어. 밥먹듯이 바람을 피우곤 했다더군.”“그게 미모의 증거가 되려나.”“옆 동네에 버젓이 새 살림을 차린 적도 있어서 외조모가 애들을 이끌고 잡으러 갔었댔나…. 또 노름도 했고, 종종 아내에게 손찌검도 했다고 들었어.”그는 후-, 하고 가늘게 숨을 내뱉었다. “당신 외할머니는 그런 사람 제삿상을 잘도 차리고 있네.”나는 할 말이 없어 어깨만 으쓱 들먹였다. 옷자락이 딸려 올라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들은 행복했다. 내가 목격한 바로는 그랬다. “시대정신이었으려나. 노름하고 돌아와 아내를 패는 것쯤 남자다운 일의 일부였던 거지. 이 노인네도 지금은 이렇게 물주머니같지만 젊었을 적엔 심심할 때마다 아내를 된통 주물러놨을지도 몰라.”“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밉상이네.”“우리도 좀 주물러줄까?” 그가 농을 걸었다. “지금은 행복할지도 모르니 됐어.”노인이 또 울부짖었다. 이번에도 짐승의 울부짖음같은 소리였다. 그것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언어의 단정한 옷을 입지 못한 채 사방으로 흩어지는 듯했다. 어떤 불쾌한 애처로움, 어떤 죄책감 같은 것을 자국처럼 남기며. 노인은 길게 신음했다. 고통스러운 듯했다. 고통을 피해 자세를 바꾸려는 몸부림이 포획된 야생동물을 연상케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안마는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나는 설명을 기다렸다. 좀 아프겠지만 참아야 한다는지, 안마 효과를 보려면 어쩔 수 없다든지 하는 무심한 안내가 따라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안마사는 말이 없었다. 거친 침묵 속에 노인의 신음이 곧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창唱 같은 흐느낌, 그러니까 곡소리. 고통을 잊기 위해 부비적거리는 피부와 PVC매트의 마찰음. 사지의 꾸물거림. 안마 침대의 느슨한 조인트. 반쯤 풀린 나사가 내는 금속성의 떨림. 겨드랑이, 어깨, 팔꿈치에 스치는 반팔 유니폼의 섬유. 면 특유의 부서지는 듯한 사각거림. 나는 위아래로 움직이는 안마사의 등을 보고 있었다. 침묵의 구성성분 중에 내게 필요한 건 없었다. 생각해보니 내겐 필요한 게 없었다. 안마를 받는 건 내가 아닌 노인이다. 뭘 어떻게 설명할까? 등에 글씨를 써서? 안마사가 숨을 몰아쉬었다. 굳이 침묵을 깨기 위해 나는 말했다. “내 외조부모는 행복했어. 내가 직접 목격했으니 사실이라고 봐도 될 거야. 어떤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법이잖아. 당신이라면 무슨 말인지 잘 알고 있겠지.” “….” “그건 분명 그 자리에 존재했어. 그래,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된 건지는 몰라. 어쩌면 진위를 검토해볼 수도 있을 거야. 부정할 근거는 차고 넘치니까. 이를테면 내 외조모의 이마에는 젊을 때 재떨이로 맞아서 생긴 흉터가 있었어. 뒤통수엔 선물받은 비녀를 달고 다녔고. 그런 거야. 당신이 말한 것처럼, 시대정신….”안마사는 안마에 열중했다. “하지만 부정한다고 해서 사라지진 않았을 거야. 판사가 찾아와 당신들은 행복하지 않다고 선고해도 그들은 노인네들이 하듯이 샐쭉한 표정만 지었을 거야. 겉으로는 굽실거렸을지도 모르지. 내 외조부모는 배움이 짧고 순박해서 높은 사람이라면 다 모셨거든. 그런데 그게 바꾸는 건 아무것도 없었을 거야. 그들은 겉으로는 원하는 대답을 해주고 그냥 살던대로 살았을 거야.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말야. 예전에 머리를 맞았잖아, 하고 외조모 이마의 흉터를 직접 짚어줘도 자기 남편을 한 번 흘겨보고 말았을 걸. 미안하다는 말은 없어. 용서도 없고. 그런 거랑은 상관 없이 둘은 행복했어.” “….”“삶을 그렇게 단순하게 느끼는 재주가 내겐 없어.”“…그게 지금의 시대정신인가보지.” 안마사가 입을 열었다. 노인의 흐느낌은 어느새 멎어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했다. “거의 다 됐겠다.”“뭐가?”“시간이.” 하고 말한 뒤 그는 뭔가 기다리는 것처럼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바로 옆 동네에 평생 한 번도 때리고 맞은 적 없다는 노부부가 있었거든. 나는 실제로 보진 못했어. 그냥 기담이나 영웅담처럼 전해 들었을 뿐이야. 그런데 이 노인네들한테는 전설이 하나 더 있었어.”“뭔데?”“한 번도 같이 잔 적이 없었대.”“단 한 번도?”나는 그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고 상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들었어. 평생 각방을 썼고, 자식도 없었대. 그럼 성교도 없었을지 모른다는 게 소문의 요지였지.”“순식간에 전설에서 소문으로 격하됐네.”“목적의 차이 아니겠어?”“각자 해결했던 걸까? 결혼은 했지만 서로 영 동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이유로 말야.”“아니면 단순히 섹스를 필요로 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부부간에 사이는 좋았다는 것 같아. 뭐, 이것도 전해들은 것 뿐이지만.”“그들에게도 행복이 있었으려나….”알람이 울렸다. 그는 워머에서 물수건을 꺼내 노인의 등을 닦아주었다. 침대에서 일어선 노인의 얼굴은 한 시간 전보다 붉고 축축했다. 자기가 어디에서 일어났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탁한 눈이 주변을 천천히 돌았다. 그러다 예고도 없이 안마사의 손을 낚아채듯 잡았기에 나는 살짝 놀랐다. “다음 주에 또 오세요.” 하고 그가 말했다. 노인은 옷을 갈아입고 떠났다. 나가는 길엔 내게도 인사 같은 눈짓을 했다. 그가 캐비넷 앞에서 일회용 팬티를 벗었을 때 보인 음경이 뇌리에 박혀 한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그것은 무의미해진 것처럼 작고 초라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다리 사이에 있었다. “나도 섹스가 필요했던 적은 없는데, 이것도 일종의 시대정신일까.” 나는 혼잣말처럼 물었다. “당신과 나는 다른 시대를 살고 있나본데.”“필요해?”“늘.”“그거 참 곤란하겠네.”“정말 곤란해.”다음 손님은 농인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그쯤에서 자리를 떴다.
신시가지와 구축아파트단지 사이를 잇는 다리 바로 건너편 벤치에 그는 앉아 있었다. 평일 낮이었다 - 이건 상관 없을지도 모른다. 그의 근무조건에 대해서 나는 잘 알지 못하니까. 안마원과 상관 없는 곳에서 그를 본 것 또한 예상 밖이었으나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나를 놀라게 한 건 그에게 개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개는 주인의 발치에 앉아 있었다. 신호를 기다리는 택시기사처럼 무심한듯 가늘어진 눈으로 약간 먼 곳을 바라보면서. 삼성화재 안내견학교 출신이라는 문구가 노란색 하네스 옆구리에 적혀 있었다. 하네스에 연결된 손잡이는 주인의 손에 붙들려 있었다. 나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를 스쳐지나갔다. 여느 때처럼 하천을 달리는 중이었다. 바로 옆을 지났는데도 개는 귀를 살짝 움찔거렸을 뿐 내쪽을 경계하지는 않았다. 안마원에서 일할 때 개는 어디에 가 있는 걸까. 불쑥 떠오른 질문이 하천을 따라 약 10km를 달렸다. 다음날에도 같은 자리에서 그를 보았다. 이번에도 개와 함께였다. 누군가 기다리는 것처럼 개와 주인이 나란히 앉아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는 것은 개의 담당이겠지만, 아무튼 그런 것처럼 보였다. 나 또한 어제와 마찬가지로 그들을 지나쳐 달렸다. 최근들어 행동반경을 넓힌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우연히 나의 러닝 코스와 겹친 것이다. 안내견에게 안전한 산책로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더니 이쪽으로 이끌었다거나. 이틀 연속으로 그의 모습을 본 일은 그런 식으로 설명될 수 있었다. 하지만 가능한 설명만으로는 그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게 나일 것 같다는 이상하리만치 확실한 직감도.나는 뒤돌아 그를 향해 달렸다. 이번에는 개가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사람을 의식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나는 3미터쯤 사이를 두고 멈춰서서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는 것처럼 개가 주의를 기울였다. “지서연씨?” “그래.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누구 기다리나?”“그냥 앉아 있었어.”개는 주인의 말을 들었다. 주인과 말을 나누는 상대가 별로 위협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가볍게 자세를 바로잡은 다음, 개는 다시 자신의 업무로 돌아갔다. “옆에 앉지 그래? 멀리서 말하면 개가 피곤해하거든.” 그가 말했다. 어젯밤 내린 비로 벤치는 아직 축축했다. 젖었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습기가 배어 있었다. 비싼 옷에 얼룩이 질 수도 있으니 웬만해선 앉지 않는 편이 나은 상태였다. 나는 운동복차림이었으므로 개의치 않고 앉았다. 그의 바지는 검은 색이었다. “어제도 이 앞을 지나갔지?” 그가 물었다. “발소리를 들었어. 당신인 줄은 몰랐지만.”“기억력도 좋네.”“시력 대신 얻은 초능력 중 하나지. 나는 메모를 할 수 없으니까 여러가지 일들을 기억해두곤 해.”“점자는?”“그렇게 귀찮은 일을 어떻게 일일이 하겠어.”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마원 휴가거든, 하고 그가 덧붙여 말했다.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휴가야. 목요일엔 예정대로 열 테니까 당신한텐 굳이 말하지 않았어.”“늦은 여름 휴가인가?” 내가 물었다. “아니, 상이래. 원장 부친상.”“그렇군.”“예약을 안 하는 건 도주 중이기 때문이야? 전화번호를 남기면 꼬리가 밟히니까?”“전화가 없어.”“인터넷 예약도 돼.”“인터넷도 안 써. 아예 연결이 안 되어 있어.”“그럼 공중전화로…. 됐어, 그럴바엔 그냥 워크인으로 들어오는 편이 낫겠네.”그는 이렇게 말하곤 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개의 머리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아는 눈치였다. 개는 신중한 사람처럼 느린 동작으로 다리를 접어 엎드렸다. 엎드린 채로도 어딘가를 내다보기를 멈추지는 않았지만. “안마원 남자들은 여자를 사러 갔어.” 그가 말했다. “가끔 단체로 가거든. 딱 하나 있는 여자 안마사는 빼고 말야. 친해졌다고 생각했는지 나한테도 함께 가자고 권했는데, 난 거절했어.”나는 잠시 생각해보고 물었다. “그 안마원에서 일한 지 얼마 안 됐나?”“얼마 전에야 자격을 땄거든. 실은 몇 년 전까지도 시력이 돌아올 거라는 기대가 있었어. 그런데 그것 뿐이야? 왜 안 따라갔는지는 안 궁금해?”“내키지 않아서겠지.”“그래. 그런 식으로는 내키지 않았어. 윤리나 위생의 문제는 아냐. 만약 내가 섹스를 한다면 그걸 기점으로 뭔가 바뀔 거라고 확신해. 뭐가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순 없겠지. 그래서 난 아껴두고 있는 거야.”“나는 몇 번 해봤는데, 딱히 그걸 기점으로 뭔가 달라졌냐 하면 잘 모르겠는걸.”“당신처럼 거친 일을 하는 사람이야 그렇겠지. 나는 델리케이트한 인간이라 소중한 내 꽃을 운명의 상대에게만 허락할 거야.”“하하!”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웃으라고 한 말이 아냐.” 하며 투덜거렸지만 그도 웃고 있었다. “미안.”“나는 심각해. 내 의지랑 상관 없이 몸은 누구에게라도 상관 없이 안기고 싶어 하거든. 몽정을 하면 말이지,”“어차피 한 가지 꿈밖에 못 꾸는데 무슨 몽정을 한다는 거야?” 나는 그의 말을 끊고 물었다.“경찰이 찾아오기 전에 여러가지 일이 일어나. 아무튼 몽정은 끔찍하다고. 세면대에서 속옷을 빨고 있으면 말로 할 수 없이 불안한 기분이 들어. 꼭 누가 보고 있다가 거기 아직 덜 닦였다, 하고 지적할 것만 같아서.”“하하.”“나는 혼자 살지만, 그래도 그래.”“우리가 친구같은 사이가 되어버렸다고는 생각했는데 말야. 그래도 몽정 이야기까지 듣게 될 줄은 몰랐네.”“좀 그런가? 당신 몸을 잘 아니까 당신도 나에 대해 그럴 거라고 생각했나봐.” “잘 아는 건 등 뿐이겠지.”나는 이렇게 말하고 개를 바라보았다. 개는 몸통을 J자로 구부린 채 엎드려 있었다. 개의 척추는 이래도 괜찮은 것인지 궁금했다. “당신 개 좀 만져도 돼?” 그에게 물었다. “그래.”그가 먼저 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개는 가만히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아는 것처럼. 그 다음 그가 내 손을 끌어다 개의 머리에 얹었다. 그것은 부드러운 가죽으로 덮인 호두 모양의 공 같았다. 목덜미와 등을 쓰다듬는 동안에도 개는 약간 몸을 움찔거렸을 뿐 저항하지 않았다.“뭐랄까, 텁텁한 느낌을 주는 털이네.” 내가 말했다. “유분 때문에 그래. 당신 등은 유분이 적절한 편이야. 매끄럽고 촉촉해.”“좋은 평가 고마워.”“언젠가 누가 내 등에 대해서도 말해줬으면 좋겠어.”“안마를 받지 그래? 도움이 되는데.” “등에 대해 말하는 건 안마에 포함되어있지 않잖아.”서비스로 안 되나, 하며 나는 계속 개의 등을 쓰다듬었다. 털 아래로는 생각보다 살집이 없어 이상하게 느껴졌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래? 친구로서.”“그래. 같이 자자는 것만 아니면.”“나도 당신이랑 자고 싶진 않아.” 그는 퉁명스레 대꾸하곤 잠시 침묵했다. “…아니, 자고싶을지도.”“그건 친구로서 들어줄 수 없는 단 한 가지 부탁인데.”“부탁은 그게 아냐. 당신 총 가지고 있지?”“….”“가끔 당신 손에서 기름 냄새가 나. 기계에 쓰는 기름. 그리고 묘한 불 냄새도. 예전에 경찰이 온 적 있었는데, 같은 냄새가 났어.”“리볼버야. 경찰이 쓰는 것과 같은 모델은 아니지만.”“그걸로 나를 좀 쏴줄래?”“지금?”“아니. 언젠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멀리서 쏴줘. 그리고 만약 그때도 웬디가 있으면 당신이 좀 맡아줘. 다시는 안내견으로 살지 않기를 바라.”“개 이름이 웬디였군.”“내가 지은 게 아냐. 부탁 들어줄래?” 나는 개를 좀더 쓰다듬다가 그러마고 답했다. 그리고 또 개를 한참 쓰다듬었다. 웬디라는 이름이 적힌 명찰이 하네스에 달려 있는 것이 그제서야 보였다.
그의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쏘는 편이 나았다. 예상치 못한 순간이란 먼 미래가 아닌 사각지대에 있는 법이다. 기회를 놓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순간 내게는 총이 없었고, 그가 바란 것처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설령 그가 총의 장전음을 놓치더라도 웬디의 코과 직감이 위험을 감지해 나를 물어뜯을 수 있는 거리였다. 그리고 나는, 망설였다. 이게 가장 큰 이유였다. 나는 그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개가 있으니 스스로 집에 갈 수 있었겠지만 그는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이게 마지막이라는 걸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도주 중이었으며, 이제 다른 곳으로 도주할 차례였다. 언젠가 이 도주도 막을 내릴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는 머리를 기르고 다른 사람의 얼굴로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혹은 이 도주는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믿을만한 조력자를 구해 지도 위의 상자에 틀어박히거나 그와 함께 영원히 달리게 될 지도. 그럼 나는 결국 무언가를 아끼게 될 것이다. 맹인이라는 말은 쓰지 않는 사람이 될 것이다. 신경쓰고, 부정하고, 매달리게 되리라. 도주는 그런 식으로 지속될 수 없다. 그의 집 앞에 섰을 땐 아직 한낮이었다. 자연광 아래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선명해보였다. 누구도 안녕이라 말하지 않고 있었다. 개는 얌전히 주인의 이별을 기다렸다. “나도 언젠가 같은 부탁을 해두었어.” 내가 말했다. “같은 부탁?”“그래. 나를 잘 지켜보고 있다가 나약해진 순간 망설이지 말고 쏴 달라고. 믿을만한 사람에게 말해두었으니 아마 약속을 지킬 거야.”그는 대답하는 것을 잊은 듯 가만히 있었다. 하네스를 붙잡지 않은 쪽 손을 잡아다 총 모양을 만들어주었다. 총구가 힘없이 떨어져 바닥의 한 점을 겨누었다. “아직 머리가 붙어 있는 걸 보니 그가 보기에 나는 충분히 나약하지 않은 모양이야.”“누구한테 부탁했어?”“동료에게. 그런데 그 사람도 자기 동료에게 비슷한 부탁을 해두었다고 했거든. 이미 죽어버려서 찾아오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네.”“당신은 오래 살아야 할 텐데.”“그럴 생각이야.”나는 개의 정수리에 시선을 던졌다. 무릎을 굽혀 그 텁텁한 털을 한 번 쓰다듬었다. 주인을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고 훈련받은 개는 정숙함을 지켰다. 갈게, 하고 속삭인 다음 나는 일어나 왔던 길을 돌아갔다.
한 번의 총성이 모든 것을 끝낼 것이었다. 시력을 바치고 얻은 초능력이 없는 나로서는 그 먼 총성을 들을 수 없으리라. 거리는 한산했다. 그가 개를 데리고 앉아 있던 벤치에는 이제 어린애 둘이 붙어 앉아 화면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나는 다리 앞에 서서 하천을 따라 깐 러닝트랙과 건너편 아파트 단지를 번갈아 보았다.
어디선가 한 발의 총알이 총구를 탈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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