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란기

2020년에 독립출간한 단편집 kitsch kitsch yyy 에 실었던 단편입니다. 해당 단편집은 현재 절판되어 구매하실 수 없습니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예진 씨는 매우 매력적인 여자가 되어 있었다. 열 다섯 살 무렵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은 예진 씨 앞에서 수상쩍게 얼굴을 붉혔으며, 바로 엊그저께까지 함께 뛰놀던 친구들은 갑자기 그녀를 먼 나라의 공주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급작스럽게 획득한 아름다움에 대해 온갖 말들이 오갔으나 그중 예진 씨의 귀에 들어간 것은 없었다. 막상 얼굴을 마주하면 모두들 빚이라도 진 것처럼 그녀를 즐겁게 해주려 애쓰곤 했기에.자연스레 예진 씨는 첫 연애를 시작했는데 금세 그것에 몰두하게 되었다. 상대방이 제공하는 관심과 약간의 헌신이 마음에 쏙 들었던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예진 씨의 소녀 시절은 온갖 종류의 연애로 점철되었다. 근처 공과대학생, 기간제 체육 선생님, 자주 가던 노래방 아르바이트생과 때로는 친구의 친척 오빠까지. 언젠가 마음먹고 추려보니 기십 명은 훌쩍 넘었다. 어째서 그렇게 많은 상대를 만났느냐고, 그때 나는 예진 씨에게 물었다. 당연히 대답은 듣지 못했다. 그런 질문에 즉석에서 답을 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만약 당신이 그런 사람을 한둘 알고 있다면, 부디 지갑을 조심하라고 권하고 싶다(질문을 듣기도 전에 할 말을 정해두는 이들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다행히 우리는 일반론에 기대 볼 수 있다. 예진 씨의 복잡했던 삶을 호떡 누르개 같은 것으로 납작하게 눌러보는 것이다. 불공평해 보이지만, 일반론은 누구에게나 불공평하게 적용되므로 사실 공평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무튼간에 그런 식으로 도달하게 되는 곳은, 그녀의 좁은 집이다. 예진 씨는 가난했다. 정확히 말하면 예진 씨의 부모가 가난했다. 벌이에 비해 식구가 많았던 탓이다. 그녀는 위의 두 언니에게 브래지어까지 물려 입었고 아래 남동생에겐 번번이 반찬을 빼앗겼다. 자라는 내내 자매들과 한 방을 썼는데, 그나마 언니들은 침대에서 잤지만 예진 씨에겐 이불만 달랑 주어졌다. 아침이 되어 요와 이불을 옷장에 넣으면 그녀의 자리는 사라졌다. 사실 집안 어디에도 예진 씨의 자리는 없었다. 연애로부터 예진 씨는 그것을 획득했다. 좁아터진 집에서 조금만 밖으로 나가면 예진 씨를 위한 자리는 얼마든지 있었다. 요컨대 문장의 양 끝에 ‘좁은 집’과 ‘많은 연애’를 끼우고 중간에 아무거나 적는 식으로 그녀는 연애를 반복해왔던 것이다. 우리는 물론 이 사실을 모른척 해주어야 한다. 인간으로서의 깊은 애정으로. 세상이 반으로 똑 조각난다고 해도 예진 씨 만큼은 자기 연애의 기원을 짐작할 수 없게끔.
그런가하면 예진 씨가 자기 몫의 고독을 챙기게 된 계기는 운전이었다.스무 살의 1월, 예진 씨는 친구들과 함께 운전면허학원에 등록했다(물론 수험표 할인이 적용된 가격으로). 학원에서는 필기 세 시간 기능 네 시간 수업만 받으면 누구든지 일주일 안에 운전면허를 딸 수 있다고 홍보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막 수능을 마쳐 아직 머리가 말랑말랑한 ‘수험표할인반’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일까, 함께 등록한 친구들 중 정말로 일주일만에 면허증을 받아 나온 건 예진 씨 한 명 뿐이었다. 그녀는 운전에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운이 좋았다. 내비게이션도 없이 초행길을 척척 찾을 수 있었으며 늘 옳은 길을 선택했다. 때로는 위성보다 교통사고를 먼저 감지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그것을 몹시 즐겼다는 것이다.가족들이 잠든 깊은 밤이면 그녀는 차를 끌고 짧은 여행을 떠났다. 오래된 방향제의 먼지 섞인 라벤더 향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매끄럽게 기어를 바꾸어가며 낡은 미니밴을 몰고 있노라면 삶의 지리멸렬함이 차창 밖의 가로등빛처럼 하염없이 뒤로 밀려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일곱 살 때부터 타던 차였지만 운전석의 시점은 색달랐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마음에 드는 곳에 차를 세우고 음악을 크게 트는 것이 그녀의 여행이었다. 그리고 온 길을 그대로 돌아갔다. 당연히 세상에는 더 좋은 차가 있다. 엔진은 부드럽게 깨어나고, 운전하는 이의 마음을 미리 알아챈 것처럼 가볍게 가속되며, 마치 신체의 일부인 것처럼 아주 작은 힘으로도 유연하게 움직이는 차. 그러나 그런 차들은 대체로 비싸다. 시범주행을 마치고 만족스러운 떨림을 느끼며 가격을 확인하면 비슷한 다른 두 문장을 동시에 떠올릴 만큼 -이렇게 비싸니까 성능이 좋은 거구나/이렇게 비싸니까 당연히 좋아야지. 반면 어떤 종류의 차들은 특정한 이에게만 그 역량을 은밀히 드러낸다. 별볼일없는 외피를 뒤집어쓰고 발견될 날을 참을성있게 기다린다. 명마가 팔라딘을 기다리듯이. 당신이 그 차가 원하는 주인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저 그런 고물차에 머무를 것이다. 고급 휘발유를 쓰고, 엔진 오일을 넣고, 마모된 타이어를 교체해도 소용 없다. 아무튼 세상에는 그런 차도 있다. 만나기 힘들 뿐. 예진 씨의 경우엔 이러했다. 어느 맑은 일요일 오후 그녀는 중고차단지를 찾았다. 주차장 사이를 무심히 걷다가 이십 년 된 볼보 왜건을 골랐다. 운전석에 앉아 문을 닫자 묵은 침묵이 귀를 파고들었다. 숨을 가볍게 들이마시고 핸들에 손을 얹었다. 좋은 모양으로 마모된 핸들이 손바닥에 착 달라붙었다. 안전벨트를 매고, 룸미러를 조정하고, 망설임 없이 시동을 걸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짐승처럼 둔중한 진동이 차체를 떨었다. 위험한 짐승을 다루듯, 부드럽지만 단호한 태도로, 그녀는 엑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왜건이 앞으로 나아갔다.그 회푸른색 볼보 왜건이 예진 씨를 선택했다. 예진 씨 또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다시는 이렇게 좋은 차를 만날 수 없을 거야. 짧은 시범주행을 마치고 돌아와 그녀는 떠올렸다. 괜찮은 차죠? 딜러가 눈치없이 물었다. 핸들에 얼굴을 파묻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예진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통하는 느낌이 있네요. 문제는 돈이었다. 아무리 중고차라도 아르바이트로 용돈과 학비를 충당하는 대학생이 사기엔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오늘은 그냥 둘러보러 온 거였어요. 예진 씨가 고백했다. 초승달처럼 구부러져 있던 딜러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예진 씨는 알지 못했으나, 그에게도 나름의 사정은 있었다. 그 볼보 왜건은 몇 년간 구석만 차지하던 애물단지였다. 이따금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이 있어도 매번 자잘한 말썽을 일으키는 바람에 팔리지 않았다. 창문이 내려가지 않는다거나, 에어컨이 제멋대로 켜진다거나. 이 회푸른 색이 문득 눈에 띄는 날에는 장사도 잘 되지 않는 듯했다. 예약금을 걸게요. 예진 씨는 용기를 내 말했다. 계산으로 복잡해진 머리가 무겁게 느껴졌다. 아르바이트 시간을 늘리고, 장학금을 받고, 까짓거 다이어트 삼아 한 끼쯤 굶으면 예약금까지는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머지 대금은 어떻게 치르지? 오십만 걸어놔요. 부러 샐쭉한 얼굴을 하고 딜러가 말했다. 원래는 일주일까지만 홀딩해주는데, 아직 학생인 것 같고 하니 사정을 봐 줄게. 기간은 신경쓰지 말고 돈 모으는대로 와요. 아무한테도 안 팔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감사합니다. 예진 씨는 짧게 인사했다. 아가씨가 워낙 예뻐서 봐주는 거야, 딜러는 능글맞게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그 볼보 왜건은 중고차단지 한구석에 조금 더 머무르게 되었다. 이전과는 다른 운명을 앞에 두고.
K를 만났을 때까지도 예진씨의 신경은 온통 잔금에 쏠려 있었다. 까마득한 금액이 하루 온종일 머리 근처를 둥실둥실 떠다녔다. 추가 수당을 받기 위해 아르바이트도 밤으로 옮겼다. 그런 상황에서 예진 씨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게 된 것은 꼭 K가 눈에 띄는 미남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K는 흠잡을 데 없이 잘생긴 얼굴에 키도 훤칠하게 컸다. 그리고 그에게는 좀 초연한 구석이 있었다. 바로 이 점이 다른 남자들과 K를 구분했다. 예진 씨는 지금껏 자기 좋다고 따라다니는 남자들을 오백 명은 만나 보았다. 그들과 모두 데이트했다는 뜻은 아니고, 지금껏 알고 지낸 남자들 중 그녀를 좋아한 사람이 얼추 오백 명은 되었다는 뜻이다. K는 그 중에 없었다. 예진 씨에게는 그 점이 신선했고, 오히려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몇 번 함께 식사를 하거나 영화를 본 이후 여러가지 의도적인 우연이 그들을 연애로 이끌었다. K는 유달리 어른스러운 남자였다. 그것은 그를 위한 단어였다. 누구나 그를 어른스럽다고 표현했다. 그는 예진 씨가 떨어뜨리고 간 머리끈을 소중하게 주워모아 욕실 서랍 안에 넣어 놓았으며 언제 잠들든 같은 시간에 일어났다. 야무지게 요리를 했고, 상황에 맞는 컵과 접시를 잘 맞추어 썼다. 혼자 사는 아담한 아파트엔 시간을 두고 고른 듯한 가구들을 들여놓았다. 그렇게 비싸진 않지만(물론 예진 씨에게는 비쌌다) 실용적이고 아름다운 것들이다. 대인관계도 원만했다. 말이 많지 않지만 누구에게나 호감을 샀다. 적어도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그는 다정했다. K는 예진 씨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예를 들어 새벽 두 시에 흔들어 깨워 뭔가 먹고 싶다고 말해도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갖고 싶어 하는 것은 모두 사주었고, 심지어는 아파트까지 기꺼이 내주었다. 그의 옷장에는 이제 예진 씨의 옷이 더 많았고, 욕실 선반도 모조리 예진 씨가 차지했다. 그러나 예진 씨는 만족할 수 없었다. 어떤 자그마한 불안이 사진 한켠에 남은 얼룩처럼 끝없이 그녀를 괴롭혔다. 예진 씨는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어야만 직성이 풀렸다. K는 예진 씨에게 헌신적이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언젠가 한 쪽이 상대에게 이별을 고할 것이다. 그 시점이 언제인지, 이유가 무엇인지 예진 씨는 알고 있어야만 했다. 다시 말해 그녀가 선택권을 가져야 했다. 그러나 K는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게 늘 평정심을 유지했고 희생을 자처함으로써 도리어 우위를 점했다. 그의 그러한 성격은 예진 씨로 하여금 절망감을 느끼게 했다. 예진 씨가 터득한 연애의 기술들은 K에게는 잘 통하지 않았다. 언젠가 뻥 차일지도 몰라, 예진 씨는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생각했다. K에게 술을 먹이려다 실패하고 자기만 잔뜩 취한 날 밤이었다. 이렇게 제멋대로 굴다가는 언젠가 정말로 차일지도 몰라. 매번 나만 화를 내고 떼를 쓰잖아. 저 사람은 절대로 흥분하는 법이 없어. 나를 찰 때도 평온하고 신사적인 방식으로 차겠지. 그건 정말 자존심이 상할 거야. 발을 동동 구르면서 발악해봤자 진정할 때까지 가만히 등을 두드려줄 걸. 차라리 내가 먼저 차버려야겠어. 아냐, 아직은 헤어지고 싶지 않아. 게다가 헤어지자고 해봤자 이 사람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을 거야. 그럼 너무 억울하고 약이 올라서 내가 또 엉엉 울게 될 걸. 맨날 나만 안달난다는 말이지.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예진 씨는 이런 생각을 오랫동안 했다. 그러다보니 다시 K가 만족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무튼 그는 지금껏 만나온 남자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는 다정했고, 헌신적이었다. 그리고 어른스러웠다. 누구든지 보상처럼 느낄 만한 남자였다. 언젠가 결혼하게 될지도 몰라, 그녀는 생각했다.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다는 것을 그때의 예진 씨는 잘 알지 못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예진 씨와 K는 정력적인 커플은 아니었다. 그들은 가끔 생각났다는 듯 섹스를 했고 그마저도 간단히 끝냈다. 기념일엔 촛불을 켜고 와인과 케이크를 먹었지만 토끼 귀를 쓰고 비키니를 입진 않았다.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건 함부로 단언하기에는 너무도 복잡다변한 것이다. 아주 가끔은 그들도 어떤 분위기에 휩쓸려 깊고 농밀한 섹스로 파고들었다.그 날, 예진 씨는 창문을 살짝 닫았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바람이 얇게 비치는 여름 커텐을 찰랑이고 무릎 안쪽을 가렵게 했다. 어떤 동물적인 욕구가 여름바람을 타고 날아든 듯했다. 그것은 그리스 신화의 악동처럼 집안을 부드럽게 뒤집고 그녀의 허벅지까지 파고들었다. 초저녁에 깜빡 잠이 들었다 일어난 참이었다.막 밤으로 접어들기 시작한 빛이 사물의 윤곽을 끈적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해가 질 무렵 불을 켜는 것을 잊으면 이런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그들은 약속한 것처럼 서로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입술 뒤로 부딪히는 작고 단단한 치아의 감촉을 느끼며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옷을 벗었다. 얇게 배어든 땀 때문인지 몸의 마디마디에 옷이 걸려 거치적거렸다. K는 발목에 베이지색 면바지를 매단 채로 예진 씨의 브래지어 끈을 잡아 뜯었다. 그의 마지막 손길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었다는 것을 예진 씨는 눈보다 촉감으로 먼저 알 수 있었다. 다른 체온의 살결이 배와 팔 안쪽에 닿는 부드럽고 낯선 느낌이 금세 온몸으로 번졌다. K는 단 한구석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예진 씨를 어루만졌다. 기묘한 최면에 걸린 것처럼 금세 온 몸이 축축하게 젖어오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시작도 끝도 없는 흥분감이었다. 예진 씨는 K의 어깨를 움켜쥐었던 손을 내려 그의 페니스를 쓰다듬었다. 그것은 평소보다 훨씬 더 크고 단단하게 부풀어 있었다.섹스는 시작하자마자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예진 씨는 물방울을 터뜨리듯 신음을 흘렸다. 매트리스의 스프링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점점 빨라지고 방안의 공기가 더워졌다. 공기보다 수분이 더 많은 듯했다. 평소와 다른 탓인지 기묘하게 흥분되었다. 커진 페니스의 효과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좁고 부드러운 벽을 따라 들어와 그녀의 몸 안을 사정없이 활보했다. 흥분으로 축축히 젖은 성기와 살갗이 부딪히는 소리가 귀를 애무하는 것처럼 간지러웠다.섹스는 점점 더 절정의 한 점으로 다가갔다. 이제 그것은 둥글고 부드러운 덩어리가 되어 마지막 한 번의 피스톤질이 그 껍질을 깨뜨려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진 씨는 허리를 뒤틀며 못 참겠다는 듯 교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허리의 각도가 뒤틀릴 때마다 새로운 자극이 전해져왔다. 그녀는 그의 허리를 단단히 감고 있던 다리를 벌려 아랫배에 찰싹 붙였다. 좀 더 깊게, 세게 그녀 안으로 들어와 주길 원했다.그러나 K는 괴로운 듯한 신음을 내며 고개를 위로 쳐올렸다. 절정에 다다르기 전 늘 보이는 동작이었다. 그리고 자세를 바꾸려는 듯 예진 씨의 등 아래로 손바닥을 넣었다. 허리가 뒤로 빠지고 움직임이 둔해졌다. 잠깐 텀을 두고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속셈이었다. 평소의 평화로운 섹스 도중이었다면 예진 씨도 순순히 허리를 들어 올려 자세를 바꾸어 주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날 밤의 예진 씨는 충동적으로 조금 다른 선택을 했다. 잘못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평소처럼 자세를 바꾸어주고 그가 진정할 수 있도록 도와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난히 끈적한 공기와 이미 나른할 대로 나른해진 골반과 서양배처럼 부풀어 오른 채 절정을 기다리던 클리토리스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K의 지나친 어른스러움이 -그 언제라도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교묘함이- 예진 씨를 일상적으로 열 받게 해왔다는 점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예진 씨는 그의 어깨를 붙잡아 내리곤 등을 꽉 껴안았다. K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제대로 자극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차며 그의 페니스를 깊숙이 넣었다. 기분 좋은 이물감이 만족스럽게 질 안을 메우며 골반 안쪽의 감각을 자극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은 절정을 기다리고 있는 한 점에 정확히 부딪혔다. 짜릿한 섬광과 함께 눈앞이 아득해지며 허리가 떨렸다. 무게 없는 시간이 몇 초 지나갔다. 온몸이 이불 속으로 천천히 침잠해 가려 했다. 나른하고 기분 좋은 피로감이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퐁! 소리와 함께 무언가 매트리스 위로 떨어졌다.
………
퐁?… .
“괜찮아, 얘기해 봐. 난 이해해.”의문의 ‘퐁’ 소리와 함께 침대 위로 굴러떨어진 정체불명의 무언가 이후 K는 몸을 웅크리고 굳어 버렸다. 예진 씨는 길고 가느다란 한숨을 내뱉었다. 그것은 공기를 일직선으로 가르며 사라졌다.처음에는 그가 실수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세상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대장이 있는 법이고, 그것이 작용하는 방식과 조건도 전부 다를 것이다. 세상에는 복상사로 죽은 사람도 있다는데, 너무 만족한 나머지 뭔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극도의 공포를 느끼거나 심하게 놀라면 실금하는 동물처럼.하지만 대변은 아니다. 일단 냄새가 없었다. K가 눈 깜짝할 사이 어딘가로 치워버린 탓에 확인할 순 없었지만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정처없는 추측 뒤로 K는 죽은 물고기처럼 굳어 시간만 흘려보낼 뿐이었다. 아무리 위로하려 해봐도 소용없었다. 어떻게든 달래보려고 노력한 끝에 그녀는 할 수 없이 침대의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변명하듯 생각하며 피곤한 눈을 벅벅 비볐다. 몇 시쯤 되었을까, 예진 씨는 문득 잠에서 깼다. 어디 갔는지, K는 보이지 않았다. 예진 씨는 K를 찾아 덜 뜬 눈으로 어둠 속을 더듬었다. 깜박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K는 분명 침대 구석에 굳어 있었다. 어디로 간 거람, 예진 씨는 눈을 찌뿌리며 방 구석구석을 살폈다. 이내 옷장 옆 모서리에 덩그러니 앉아 그녀를 바라보는 그림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괜찮아?”닫아 놓은 커튼 뒤로 도시의 밤 불빛들이 비집고 들어왔다. 퍽 재미난 것이라도 있다는 듯이. 예진 씨는 잠자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길고 의뭉스러운 시간이 흐른 후 그는 별안간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앉았다. 어둠 속에서 꺽꺽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K는 예진 씨가 누워 있는 침대 아래 무릎을 꿇은 채 하염없이 울어댔다. 당황한 그녀가 뛰어 내려와 머리통을 끌어안고 달래보아도 소용없었다. 그는 한참을 펑펑 울더니 다 뭉개지는 발음으로 무어라 말했다.연신 등을 쓰다듬던 예진 씨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되물으니 그는 다시 꺽꺽 울어대며 말했다. 몇 번을 되물은 후에야 그것이 ‘내가 어떤 사람이라도 날 사랑해줄 수 있어?’ 라는 말이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당연하지.” ……. …….“나 흥분하면 알을 낳아.” ……. …….“뭐?”예진 씨의 되물음은 상당히 오랫동안 남아 울려 퍼졌다.
연인이란 대체 무엇일까? 사람들은 대체 왜 생판 남과 함께 살아가기를 당연스레 기대하는 것일까? 어째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을 연인이라고 부르고 그들이 서로 해주어야 할 일을 정해두는 것일까? 누군가와 연인 사이임을 선언하고 함께 살아가는 일은 늘 미묘하고 의문스러운 일이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종류의 사람이 있고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도 아무렇지 않게 연인을 만든다. 도대체 다들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이후 그들의 생활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지만 근본적인 무언가가 철컥 소리를 내며 레일을 바꿔 끼웠다. 창밖으로 비슷한 풍경이 지나가도 결국 도착하는 역은 다르다. 예진 씨는 그 철컥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는지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연인들의 생활에서 판례는 중요하다. 다들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살펴보고 대강 비슷하게 따라 해야 한다. 그것이 연애라는 것의 사회적 기능이다. 어디서도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 부딪혀 싸운 다음 기준을 만들든지, 혹은 일단 움직이지 않고 상황이 저절로 해소되기를 조용히 기다리든지. 예진 씨는 일단 판단을 미루기로 했다. 그래, 내 남자친구는 알을 낳는다. 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알게 되었다). 우선은 여기까지만. 누가 재촉하는 것도 아닌데 섣불리 판단할 필요는 없어. 게다가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하는걸. 알을 낳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잖아. 부화하는 것도 아니고. 예진 씨는 스스로 이렇게 되뇌었지만, 그녀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모두가 깜박 놓쳐 버리는 부분이지만,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언제까지고 사정을 봐주지는 않는다. 뭐든 좋을 대로 모른척해도 됐다면 인류는 아직까지도 나무 열매와 도토리를 끼니 삼으며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묵묵히 흐르면서 K의 산란은 아주 미묘한 방식으로 그들의 삶에 스며들었다. 임시로 붙여둔 메모지처럼 점점 투명도가 낮아져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그런 메모지는 이사갈때 쯤 겨우 떼어내게 된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그는 재채기할 때도 알을 낳아대고 있었다. 크게 기쁘거나 화가 났을 때, 그리고 깜짝 놀라거나 울적해질 때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그도 분명히 조심스러웠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시간은 지속적으로 허들을 낮추었다. 섹스를 하고 알을 낳는다면 다른 때 낳지 못할 것도 없다.예를 하나 들어보자. 어느 주말 밤 그들은 거실 소파에 앉아 영화를 보고 있었다. 별 생각 없이 틀어둔 코미디 영화였는데, 무척 재미있었다. 예진 씨는 몸을 뒤로 젖혀가며 깔깔 웃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K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영화에 눈을 고정한 채 부산스럽게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조금 출출하다고 말할 참이었다. 그때 K는 통이 넓은 반바지 사이로 손을 집어넣더니 자연스레 알을 빼냈다. 소파 귀퉁이엔 달걀보다 조금 작은 흰 알이 몇 개 굴러다니고 있었다. 예닐곱 개쯤 되었을까, 소파 귀퉁이의 각 잡힌 모서리에 줄줄이 늘어선 채로. 그때부터 예진 씨는 왠지 웃을 수 없었다. 더는 배도 고프지 않았다.더불어 산란이 잦아질수록 감정의 폭도 자유분방해졌다. 부쩍 애교가 늘었으며, 사소한 일에 일일이 서운해했다. 더 자주 섹스를 원했다. 그야말로 산란기의 물고기 같았다. 그는 산란에 대해 꼬치꼬치 묻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모든 것을 미리 알고 대처해 주기를 바랐다. 예진 씨에게는 상당히 부조리한 일이었다.
불행히도 익숙해진다는 것이 모든 일을 해결해주지는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K가 알을 낳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예진 씨는 은근히 집 밖으로 돌기 시작했다. K에게는 저금이 떨어져 일하는 시간을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기도 했다. 그녀가 차를 사기 위해 모으던 돈은 딱히 쓴 곳도 없는데 어느새 바닥나 있었다. 도대체 어디에 이렇게 돈을 썼는지 의문이었다. 아무튼 예진 씨는 밖으로 돌았다. 밖에 오래 있다 온 날이면 한 눈금 더 예민해진 산란기의 K가 예진 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볼멘소리를 툭툭 던져가며 온종일 그녀 뒤를 졸졸 좇고, 자신을 쳐다봐주지 않으면 다른 이유를 붙여 화를 냈다. 물론 알도 낳았다. 서운한 알은 꼭 카드빚처럼 쌓였다. 어느 날, 새벽에 가까운 깊은 밤에, 예진 씨는 조용히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녀는 늘 빚을 갚는 기분으로 귀가했다. 엘리베이터가 조금만 더 느리게 움직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문득 섹스를 한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끔은 해주어야 한다. 연인이니까. 그럴 때면 최대한 알에 대해서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해치운다. 그러나 알이 나올만한 타이밍과 소리, 아마도 윤활제 역할을 하는 분비물의 엷은 냄새까지, 나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그녀는 조용히 도어락을 해제했다. 밤이 깊었으니 먼저 자고 있을까 싶었다. 차라리 그 편이 나았다. 현관의 센서 등이 가차 없이 켜지고, 코를 훌쩍이며 울고 있는 185센티미터의 검은 그림자를 비추었다. 그녀는 죄책감을 느꼈다. 외로웠을 것이다. 오늘 밤엔 춥고 쓸쓸한 바람이 불었다. 이렇게나 나를 필요로 하는데, 자기도 알을 낳고 싶어서 낳는 게 아닐 텐데. 조심스럽게 소파로 다가가 옆에 앉았다. 한 팔로 어깨를 감싸 안고 머리를 살짝 기댔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쌓여 있는 알 무더기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잠시 함께 울었다.
시간은 예진 씨 대신 점점 더 많은 것을 결정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관계가 원숙해져 감에 따라 K는 자연스레 예진 씨와 함께할 장래를 계획했다. 예진 씨도 어느 정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결혼과 결혼으로 인해 얻게 될 보상, 혹은 보상처럼 보이는 어떤 것들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듯했다. 알과 함께하는 생활은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모처럼 떠난 드라이브에서 야경에 젖은 K의 감상이 ‘자기야 나 알 낳을 것 같아,’ 였어도 예진 씨는 괜찮았다. 적어도 충격을 느끼진 않았다. 도저히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일이라서 였을까, 그녀는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니 어느 날 아침 예진 씨가 그를 떠난 사건은 지나치게 갑작스러운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딱히 변명하고 싶지는 않다. 갑작스러운 일이 맞았으니까. 하지만 굳이 덧붙이자면, K의 산란도 마찬가지로 예진 씨에겐 갑작스러운 사건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주길 바란다.평범한 어느 아침, 예진 씨는 아직 털어내지 못한 어제의 피로를 뒤통수에 붙인 채 식탁에 앉았다. 그녀가 식탁에 앉자마자 거의 동시에 K가 커피를 내왔고, 그녀는 그것을 홀짝이며 멍하니 아침을 받아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믈렛과 토스트가 식탁에 놓였다.오믈렛은 K가 즐겨하는 아침이었다. 그는 오믈렛을 잘 만들었다. 완벽에 가까운 노란색과 통통한 아몬드 같은 모양새,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속. 어째서 그날따라 오믈렛이 신경에 거슬렸는지는 모르겠다. 그 통통한 모양이 무언가를 연상케 했을는지도. 아무튼 예진 씨는 K에게 물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누군가 그녀를 잡아 말렸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은 일들이 세상에는 있다.“네가 낳은 알들은 어디로 가?”
그날 오전이 지나기 전, 예진 씨는 볼보 왜건을 타고 고속도로를 실컷 달렸다. 오랜만에 중고차 매장에 들러 그것을 렌트했다. 잠깐 달리고 오겠다고 하니 비용도 받지 않고 빌려주었다. 연료도 가득 채워져 있었다. 평일의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그럴 만한 시간대는 아닌데, 모두가 예진 씨의 마음을 이해해주고 있는 것처럼 도로를 비워 준 듯했다. 한참을 달리고 나니 기분이 훨씬 상쾌해졌다. 아침부터 실컷 게워낸 탓일까 배도 고팠다. 그녀는 휴게소에 들러 우동을 먹고 다시 달렸다. 슬픔의 알을 이정표처럼 흘리며 그녀를 따라오던 K의 모습이 떠올라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하도 힘껏 저어 하마터면 옆 차선으로 넘어갈 뻔했다. 바짓단 아래로 툭툭 떨어지던 알을 도저히 떨쳐낼 수 없었다.정오쯤 바닷가에 차를 세웠다. 이미 차를 돌려줘야 할 시간은 훌쩍 지나 있었다. 그녀는 이젠 빚을 내서라도 그것을 사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딜러에게 전화를 걸었다. 딜러는 뜻밖에도 값을 깎아주었다. 그 정도라면 비상금을 톡톡 털어 대금을 치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녀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전화를 끊었다.바닷가의 식당에서 점심 겸 저녁을 먹고, 카운터에서 담배를 한 갑 사서 천천히 피웠다. 박하사탕을 문 채로 담배를 피우자 온 몸의 공기가 전부 바뀌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연달아 세 개비를 피운 뒤엔 파도가 치는 모양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이후 다시는 K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을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
추신.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예진 씨는 K를 다시 보았다. 그는 짙은 회색의 비즈니스 수트에 갈색 가죽 가방을 들고 이전처럼 표정 없이 걷고 있었다. 당연히도 처음 보는 옷이었다. 어디에 가는 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예진 씨의 차가 서 있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더니, 녹색 불이 켜지자 한 마리 플라밍고처럼 우아하게 길을 건넜다. 누구도 저 남자가 산란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예진 씨는 핸들을 끌어안고 생각했다. 애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인조차도 알지 못할 것이다. 불현듯 알이 떠올랐다. 무릎 밑으로 툭툭 떨어뜨리던 알이. 그 자그마한 크기와 색,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엷은 냄새와 미묘한 따끈함, 얇고 질긴 껍질이 바닥에 부딪히며 깨질 때의 소리. 이 모든 것들이 기억 저편에서부터 단숨에 달려왔다. 아무도, 그 무엇도 모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이때 예진 씨는 문득 경적을 울려 그에게 얼굴을 보여주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K는 경쾌하고 빠른 발걸음으로 순식간에 그녀 앞을 지났다. 비즈니스 수트의 뒷자락이 아쉽다는 듯 차창 앞에서 펄럭였다. 바람이 많이 부는 모양이었다. 신호등의 녹색불이 깜박이는 것을 멈추고 횡단보도를 비워냈다. 그렇게 길었던 산란기가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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