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에서 살아남는 법

따끈따끈한 초고
“…이건 써도 되겠구나.”아버지의 말에 조오와 금성은 한 목소리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나는 점잔을 빼려고 조용히 주먹만 쥐었으나 내심 으쓱한 기분을 감출 순 없었다. 아버지는 동리에서 가장 기계를 잘 다루는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써도 되겠다고 했다는 건 곧 우리 손에 말끔하게 고쳐진 라디오가 떨어진다는 뜻이었다. 새것과 다름없이 작동하는 라디오가. “시간은 좀 걸릴 거야. 황 씨 아저씨네 펌프부터 봐드려야 하거든. 개울물을 끓여 먹고 있지만 괜찮다고 말씀하시더구나.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드렸어.” “괜찮다고 하신 거 아니에요?” 조오가 눈치없이 물었다. “비꼰 거야, 바보야.” 금성이 바로 면박을 주었다. “아.”“기다릴 수 있겠니?”“그럼요. 원래 있던 물건도 아닌데요, 뭐. 라디오 없어도 할 건 많아요.” 나는 아버지를 안심시켜드렸다.“그래도 진짜 갖고 싶은 거였어요.” 조오가 끼어들었다. “이젠 우리가 듣고 싶은 거 들을 수 있겠네. 어른들이 밭일 하거나 뜨개질 할 때 음악 듣는 거 부러웠어.” 금성도. “아무튼 저희는 기다릴 수 있어요. 아버지 시간 나실 때 봐주세요.”“여름 방학이 끝나기 전에는 꼭 고쳐주마.”“와아!”두 번째 함성이 터졌다. 이번에는 나도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보탰다. 우리 셋 중에 아버지가 계신 건 나 뿐이니 조오와 금성 앞에서는 사려깊게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주의를 들은 지 며칠도 채 안 되었지만, 이건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아버지의 얼굴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방학은 곧 책거리를 의미했다. 교과서를 반납하기 전에 연필 자국을 깨끗이 지우고,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걸로 여름방학은 시작되었다. 조오는 초콜릿을 가져오기로 했다. 그건 귀한 건데, 금성이 놀란 눈을 하니 생일선물로 받은 걸 책거리때 가져오려고 아껴두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조오에겐 서울에서 일하는 누나가 있었다. 어디서 일하는지는 모르지만 조오의 생일이나 어린이날마다 뭔가 좋은 걸 부쳐주곤 했다. “그렇게 좋은 걸 나눠 먹으려고 가져오다니. 너는 참 통도 크다.” 금성의 감탄에 조오는 약간 부끄러워했다. 금성은 언제나와 같이 닭을 삶아 올 예정이었다. 그의 집에서는 닭을 쳤다. 양계장을 하는 건 아니고 달걀을 얻으려고 마당에 닭을 몇 마리 놓아 길렀는데, 그게 수십마리로 불어났다고 했다. 그의 집에 신묘한 기운이 흐르는지 아니면 금성의 닭 치는 솜씨가 신묘하게도 좋은 건지 닭은 아직도 늘어나는 중이었다. 그래서 그의 도시락은 늘 삶은 달걀이었고, 특별한 날에는 삶은 닭이었다. 왜 뭐든 삶기만 하냐면, 금성이 닭을 치거나 잡을 줄은 알았지만 요리하는 법은 잘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는 떡을 해 주시기로 했다. 봄에 캐서 말려둔 쑥과 찰밥으로 만든 떡피에 팥소를 넣어 콩가루를 묻혀 먹는, 엄마의 특제 팥떡. 다른 아줌마들이 만드는 떡과 다르게 엄마의 떡에서는 쓴 맛이 나지 않았다. 비결은 생강즙을 아주 약간 넣는 것이라고 했다. 쓴 맛이 안 나니 애기 주먹만한 떡을 몇 개 씩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그럼 어느 순간 목이 턱 막혀 다 토해버릴 수도 있지만. 하지만 그건 비밀로 해두고 싶었으므로 나는 어묵을 가져오겠다고만 해두었다. 어묵이야 늘 집에 있으니 떡과 함께 가져가면 그만이었다. 조오와 금성이 돌아간 후 나는 홀로 마루에 앉아 있었다. 긴 여름해가 갈곳을 잃은 듯 먼 산 위에 떠 있었고, 주변은 아직 밝았다. 자작나무 이파리가 불지도 않는 바람에 손바닥을 흔들며 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생울타리 너머로 삼촌의 머리가 휙 지나갔다. 어딜 가는 걸까, 생각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자전거를 탄 채 마당으로 들어섰다. 한쪽 다리를 안장 위로 가볍게 넘기는 동시에 속도를 줄여 창고 앞에 세웠다. 모든 동작이 춤을 추듯 유연하고 정확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기름칠을 하시게요?”“영선아.” 아버지는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엄숙한 소리로 나를 불렀다. “어머니가 편찮으시다.”“아….”“한동안 많이 주무실 것 같아. 저번처럼 말야. 기억하지?”“네.”“위험한 건 아냐. 하지만 푹 쉬어야 몸이 나아질 테니까 최대한 어머니를 도와드리자.”나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도와드리자는 말은 조용히 있자는 뜻이었다. 행동도 말도 평소보다 최대한 작게, 엄마가 기력을 되찾으실 때까지. “괜찮을 거야. 기다리다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게다. 영선이가 학교에 다녕면 아궁이 앞에서 고구마를 굽고 계실지도 모르지.”“분명 그러실 거예요.”“어머니가 굽는 고구마는 최고잖니. 그렇지?”아버지는 씩 웃어보이셨다. 그 얼굴이 반쯤은 그늘에 가려져 있어서 반쯤 슬퍼 보였다. 그리고 생각났다는 듯이,“내일 책거리에 어머니가 떡을 해주시기로 했지? 그건 아버지가 만들어주마.”하고 말씀하셨다. “괜찮아요. 어묵을 구워가지고 가져가면 돼요. 조오랑 금성이도 그걸 좋아하니까요.”“만날 먹는 어묵가지고 되겠어?”“만날 먹어도 맛있는걸요. 파랑 고추장을 넣고 맵게 끓여서요, 금성이네 달걀을 풀어 먹으면 그것도 얼마나 맛있는데요.”“불장난은 안 된다.” 아버지는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절대로 들켜선 안 돼. 특히 황 씨 아저씨한테는.”나는 절대로 들킬 일 없다는 뜻으로 엄지를 치켜세워 보였다. 아버지도 웃으며 같은 동작을 하셨다. 가로등 주변으로 벌써 날벌레 몇 마리가 꼬이고 있었다. 저녁을 먹기 전에 자전거 체인을 손봐야 했다.
고추장을 발라 구운 어묵과 주먹밥, 삶은 닭고기, 김치와 계란을 넣고 싼 김밥, 초콜릿 두 알, 맨밥, 사이다. “초콜릿이 두 알 뿐인 건 그렇다고 치자고.” 금성이 말했다. “그런데 맨밥은 대체 왜 가져왔냐? 초코 반찬으로 밥 먹게?”“네가 닭 가져온다고 했으니까….” 조오가 어물거렸다. “닭 반찬으로 밥 먹고 후식으로 초코 먹게? 몇 개씩? 삼 분의 이 개씩? “수학 잘 하네.”“애초에 세 개 밖에 안 들어있었어. 딱 하나만 먹고 너네랑 먹으려고 남겨둔 거야.”“그래, 그건 감동적이라고. 근데….”답답하다는 듯 금성이 머리를 감싸쥐었다. 조오가 울망한 눈으로 금성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뭐가 문제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눈치였다. 눈치가 없으니 눈치를 살펴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먹을 건 충분하잖아,” 나는 금성을 달래려고 한 마디 던졌다. 떡이 있으면 딱 좋았을 텐데. 불쑥 떠오른 생각은 머리를 흔들어 지워버렸다. “맛있어.” 조오가 금박지로 포장된 초콜릿 한 알을 금성에게 내밀며 말했다. “진짜 맛있어. 깜짝 놀랄 걸.”나머지 한 알은 영선이 너도 먹어 봐, 하며 내게 건넸다. 초콜릿을 받아든 금성은 앓는 소리를 냈다. “아유, 이 착하긴 착한 놈….”“나는 먹어봐서 괜찮아.”“이따가 나눠 먹자. 후식으로. 어때?”“그럼 금성이는 하나 다 주고 영선이 네 거 한 입만 살짝 먹을게.”“야, 그럼 내가 뭐가 돼. 내 것도 먹어. 그냥 네가 다 먹어.”“어떻게 그래….” 둘이 투닥거리는 소리를 잠시 뒤로하고 나는 창 밖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맑고 투명했다. 한 점 걱정도 가져본 적 없는 것처럼. 그러나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근심 가득한 먹구름이 하늘을 온통 뒤덮었었다는 사실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다음주 쯤에는 아마 비가 올 예정이라는 것도. 이장님의 예보는 거의 틀리지 않으니까. 멀리 보이는 고가도로 위로 흰색 트럭이 달려가고 있었다. 흰색 트럭 외에는 도로를 달리는 차는 한 대도 없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기만 한 하늘 때문에 그것은 바다를 가르는 보트처럼 보였다.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은 없지만 비유해볼 수는 있었다. 나는 괜히 교과서를 들추어보았다. 연필 자국을 지워내느라 얇아진 종이가 크게 바스락거렸다. 하나의 이야기를 기억해낸 것은 아마도 그 촉감 때문일 것이었다. “그 이야기 있잖아, 어른들이 안 배워도 된다고 했던 거.”내가 운을 떼자 조오가 즉각 끼어들었다. “무소부지無所不知 이야기?”“전지全知 아니었어?”금성이 물었다. “둘 다 같은 말이야. 그런데 그건 왜?”나는 괜히 교과서를 팔락거렸다. 무소부지無所不知 든 전지全知 든 교과서에 나온 말은 아니었다. 그림을 보고 이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답이었지. 애초에 그 그림은 내 교과서에만 있었다. 선생님은 이런 건 사이비에 불과하고, 아이들에게 사이비에 대해 가르치는 건 위험하기도 하고 불필요한 일이기도 하니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겠다고 하셨다. 수업이 끝난 다음에는 내 교과서를 가져가 그림을 직접 잘라버리셨고. “무슨 뜻인데?” 금성이 물었다. “모든 걸 다 안다는 뜻.” 조오가 대답했다. “아하. 그런데 그건 왜?”“그 그림 나 실제로 본 적이 있거든.”“그렇겠지. 네 교과서에만 나와 있었으니까.” 별 말을 다 듣는다는 듯 조오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그 그림이 아니라 그 그림에 나와 있던 걸 봤다고. 실제로 말야.”그러고보니 얘네는 모르겠구나. 교과서에 나온 그림은 구경도 못 했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찬합과 도시락을 치워 자리를 만들고, 책상 위에 손가락으로 작은 네모를 그렸다. 금성과 조오의 눈이 이쪽으로 쏠렸다. “봐, 이렇게 네모가 있어. 네모 안에는 또 네모가 있고, 가운데 소용돌이 문양이 있어. 이런 단순한 소용돌이가 아니고 좀더 멋진 거야. 좀더 진지하고 입체적인… 무슨 말인지 알겠어?”흠, 하고 둘은 동시에 모르겠다는 소리를 냈다. “빨려드는 것처럼?” 조오가 먼저 물었다. “그러니까 블랙홀처럼?” 금성도 한 마디 보탰다. “비슷해. 그런데 완전히 똑같지는 않아. 아, 소용돌이가 아니라 똬리 모양일수도 있겠다. 여러 명이 팔짱 낀 모양 같았던 것 같기도 하고. 나도 언뜻 본 게 전부라 자세히는 모르겠어. 아무튼 그게 이런 원뿔 모양의 제단에 올려져 있어.”나는 네모 아래 원뿔을 그렸다. 수학책에 나오는 것처럼 완벽한 원뿔이 아니라 찌그러지고 날씬한 원뿔이 되었다. “근데?” “이걸 실제로 본 적이 있다고.”“어디서?”“숲 건너편에 있는 작은 건물에서. 철로 되어 있는 상자 모양의 건물. 어른들이 명절마다 성묘하러 가는 거기….”“거긴 왜 갔는데?”“아버지 따라서 갔었어. 들어가지는 않고 창문 너머에서 살짝 봤어. 그런데 거기 있었어.”조오와 금성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둘의 시선이 책상 위를 향했다. 그리자마자 날아가버린 네모와 네모와 소용돌이와 원뿔 모양의 제단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소원을 들어줄까?” 문득 금성이 물었다. “그건 모든 걸 다 안다고 했잖아. 그럼 소원을 들어주는 걸까? 어른들은 명절마다 소원을 빌러 가는 거고?”“전지하다는 건 전능하다는 뜻은 아냐.” 조오가 말했다. “둘의 차이가 뭔데?”“전지는 모든 걸 다 안다는 뜻이고 전능은 뭐든 할 수 있다는 뜻…. 아, 근데 같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걸 다 알면 뭐든 하는 방법도 알 거 아냐. 그럼 결국 전지한게 전능한 거 아닌가?”“그거 말이 되네.” “옛날 책에도 그런 말 나오잖아.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가 볼래?”나는 불쑥 물었다. 용기를 짜내 던진 말이었다. 그 건물에 가는 건 금지되어 있었으니까. 절대로 가지 말라고 한 적은 없지만, 암묵적으로 어른들만 아주 가끔씩 드나드는 곳이었다. 명절 같은 특별한 날이면 제사 음식을 챙겨 그 건물로 갔다. 내가 아버지를 따라 그곳에 갔던 것도 어른들이 깜박 잊은 술을 가져다드리기 위해서였다. 고추장을 발라 구운 어묵과 주먹밥, 삶은 닭고기, 김치와 계란을 넣고 싼 김밥, 초콜릿 두 알, 맨밥, 사이다. 그리고 네모와 네모와 소용돌이와 원뿔 모양의 제단. 나는 어지러운 책상 위를 보고 있었다. 어쩐지 죄를 고백한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조오와 금성은 한참 답이 없었다. 내가 느끼기에 그랬다는 것이다. 그들은 눈빛을 교환하는 듯싶더니 우물쭈물 말했다. “…그럴까?”
우리는 걸어서 숲으로 향했다. 다 먹지 못하고 싸온 음식들은 가방과 보자기 안에 들어 있었다. 숲 입구는 원래부터 우리의 놀이터였기에 이상하게 보일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쫓기는 것처럼, 들키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달리듯 걸었다. 짜릿한 기분이었다. 밤에 외출했을 때보다도 더. 새벽까지 속닥거리다 참외 서리를 했던 때보다도 더 가슴이 달아올랐다. 동시에 기분좋게 욱씬거리기도 했다. 우리는 숲 근처에서 배회하다가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산책로를 벗어났다. 길을 아는 내가 수풀을 헤치며 앞장서서 걸었다. 사실 모두 길을 알았지만, 자연스럽게 한 줄로 걷게 되었다. 건물은 숲을 가로질러 가면 나오는 공터에 있을 것이었다. “근데 무슨 소원을 빌 거야?” 하고 조오가 가운데에서 물었다. “….” 금성은 침묵했다. “조오 너는?”“나는 누나가 집에 오게 해달라고 빌게. 못 본지 오래 됐거든.”“명절에도 못 봐?” 내가 물었다. “엄마가 못 오게 해. 괜히 동리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조오가 말끝을 흐렸다. 쿠오-쿠오-쿠-쿠-. 안 보이는 곳에서 산비둘기가 울었다. “너는? 무슨 소원 빌 건데?”“엄마 건강하게 해달라고.” “아줌마는 아직도 아프셔?”“나아졌다가 요새 다시. 기다리면 괜찮아지실거라고 했는데, 그래도….”“맞지. 그래도 빨리 낫는 게 좋지.”“응.”“금성이 너는?”“몰라.”“너는 소원 없어? 네 것까지 내가 써도 돼?”“있어. 그리고 딱 하나씩만 빌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너무 많이 빌면 하나님이 헷갈려하실 거 아냐.”“전지전능한데 그 정도는 구별하겠지.”“그런가.”나는 나뭇가지로 발 앞을 치면서 걸었다. 뱀이 나올 수도 있었다. 이 근처엔 살모사가 없다고 했지만, 아무튼 뱀에 물리는 건 좋지 않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숲이 끝을 보였다. 멀리 건물이 서 있었다. “벌써 도착했네.” 조오가 김빠진 소리로 중얼댔다. “생각보다 가깝다, 야.” 금성도 의외라는 듯 말을 보탰다. 쿠오-쿠오-쿠-쿠-. 안 보이는 곳에서 산비둘기가 울었다. “가자.”“얘들아 발 조심해라. 풀에 가려서 그렇지 턱이 있으니까.”“네.”“거기, 웬만하면 계단 밟고 내려와. 미끄러진다.”우리는 건물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예상한 것보다 너무 빨리 도착해버린 듯했다. 좀더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건 마찬가지인듯 조오와 금성의 걸음도 느릿느릿했다. 마침내 건물 앞에 섰을 때도 도무지 결심은 서지 않았다. 어쩌다보니 여기까지 와버렸구나, 하는 막연함 뿐이었다. “으스스하지 않냐.” 금성이 말했다. “어. 무서워.” 조오가 대답했다. “버려진 건물이 다 그렇지 뭐….” 나는 겁먹지 않으려 애썼다. “근데 누가 버린 거야?” 금성은 물었다. “이게 집이긴 해? 누가 여기 살다가 버린 거지?”“집이 아니고 컨테이너 박스야. 살림살이를 갖춰두고 집으로 쓰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간이 사무실이나 창고로 써. 이건 창문이 있으니 집 아니면 사무실 용도였겠네.”“아하…. 근데 그래서 누가 버린 거야?”“건축 도급업자였던 최성필씨.”“그게 누군데?”“7년 전까지 이곳에 거주하며 일했던 건축 도급업자. 아내와 아이들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연탄불을 피워 질식사시키고 자신은 목을 매 자살했어.”“….”이런 얘긴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나는 조오와 금성의 눈치를 보았다. 겁을 먹어 달아나버리거나 하면 곤란해질 듯했다. 삼촌은 다음 말을 기다리듯이 우리 셋의 얼굴을 차례로 보았다.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지만 왠지 히죽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어른들이 여기서도 제사를 지내주는 걸까? 귀신이 나올까봐 말야.” 조오가 속삭이듯 물었다. “귀신의 존재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 없어. 하지만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미신 행위를 하는 건 흔한 일이지. 너희 부모들이 건축 도급업자 최성필씨 일가를 위해 해마다 간소한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참고로 최성필씨는 동리의 어떤 활동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그 아내만 중요한 행사에 얼굴을 비추었을 뿐이야.”“….”우리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셋 중 하나가 뭐든 결단을 내려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삼촌은 여전히 미소를 띤채 서 있었다. “네 누나는 이번 추석에 돌아오지 못할 거야.” 그는 조오에게 말했다. “그리고 네 아빠도 살아돌아오지 못할 거야. 조오의 누나가 귀성할 확률은 3퍼센트 내외고, 상황에 따라 98퍼센트까지 조정될 수 있지만 네 아빠가 돌아올 확률은 0에 수렴해. 지금 이 순간에도 0으로 수렴하고 있어.”“어떻게 하면 98퍼센트까지 조정되는데요?” 조오가 물었다. “네가 태어난 해에 내전이 있었지?”삼촌은 조오의 말을 무시하고 내게 물었다. “…51년생이에요.” 나는 마지못해 답했다.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아니?”“배가 고파서요.”“음! 좋아. 좋은 대답이야.”삼촌이 감탄하는 소리를 냈으나 별로 그런 표정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영선이 네가 사는 집은 네 할아버지 집이었어. 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41년간 절삭공구 도소매업을 하다 은퇴해 귀농할 목적으로 그 집과 일대의 땅을 구매했단다. 그러다 식량난이 터졌고, 취미로 농사를 짓던 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다시 가장 역할을 맡게 된 거야. 다른 형제들은 서울에서 부모가 보내는 곡류와 전분질채소를 받아먹었지만 네 아버지는 이곳으로 직접 내려와 농업을 배우고 땅과 집을 물려받았지. 그러다 네가 태어났고, 두 달 뒤에 내전이 터졌어.”“제가 태어난 거랑 전쟁이 난 건 관련이 없는 얘기잖아요….”“그렇지! 서로 다른 두 개의 사건이지! 하지만 내 말이 끝나지 않았단다. 너희 엄마는 소설가였어. 그런데 네가 태어날 즈음엔 아무도 소설을 읽지 않게 되어서 실직했단다. 그래서 아픈 거야. 이 부분에는 네 역할도 있는데, 맞춰볼래?”“…산후우울증이요.”“정답이야. 직업에 대한 고민 때문에 지속되던 우울감이 영선이 너를 출산한 이후로 겉으로 발현되어 완전히 병 수준에 이르렀단다.’뉴프람 정’은 더 듣지 않고, 그나마도 수급이 원활하지 않아. 병세는 앞으로 나빠질 확률이 76퍼센트정도 되는구나.”“76퍼센트면 그렇게 막 높지는 않다.” 조오가 응원하려는 것처럼 속삭였다. “물론 조정될 수도 있고.” 삼촌이 덧붙였다. “하지만 영선이네 아줌마는 늘 책을 많이 읽으라고 하시는데. 저희가 커서 책을 많이 읽으면 되지 않나요? 이장님도, 황 씨 아저씨도 가끔 읽으세요.”“그건 말야, 새로운 책을 원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거든. 아, 얘들아 오늘 책거리 축하한다!”돌연 삼촌이 박수를 쳐서 우리도 따라 쳤다. 조용한 공터 위로 손뼉을 부딪치는 소리만 길게 이어졌다. 그것은 새의 지저귐처럼 맑고 높지도 않았고, 바람처럼 넓게 퍼지지도 않았다. 그저 불규칙하게 붙었다 떨어지는 네 쌍의 손바닥을 퍽퍽, 철썩철썩, 짝짝짝짝짝 울려댈 뿐이었다. 언제까지 박수를 쳐야 하는 걸까? 나와 조오와 금성의 손은 답을 몰라 멈칫거렸다. 누군가 용기를 내 축하는 이 정도면 됐다고 말하기를 기다리면서.
숲을 빠져나가 다시 동리로 돌아가는 길은 삼촌이 바래다주었다. 삼촌은 폐 컨테이너를 엿보러 간 일을 두고 우리를 나무라진 않았다. 그는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숲을 살짝 둘러가 가재가 있는 개울을 알려주기도 했으니까. 어른들이 말하기를 예전엔 가재도 살았다던 연못에서 흘러내려간 물줄기에 아직 가재는 살고 있었다. 나와 조오와 금성은 삼촌의 손을 잡고 걸었다. 조오는 삼촌에게 풀피리 만드는 법을 물어보고 있었고, 금성도 무어라 속닥거렸다. 딱히 궁금한 게 없었지만 삼촌은 내게도 이야기를 해주었다. 지금으로부터 41분 전에 여기서 약 4킬로미터 떨어진 폐촌에 국지성 호우가 내렸단다. 갑작스런 비에 비닐 하우스에서 잠들어 있던 이성관씨가 깨어났고,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차렸어. 그는 주머니가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 가까운 포장도로를 따라 걸었어. 그러다 고가도로 위를 달리는 흰색 트레일러를 보곤 히치하이킹을 시도하려고 마음먹은 순간 소리없이 다가온 무인트럭에 치어 사망했단다. 28미터 가량 날아가서 터널 입구에 처박혔지. 사망까지는 5분 40초 가량 걸렸어. 까마귀 한 마리가 그를 발견하고 네트워크를 통해 소식이 확산되기까지는 그 두 배쯤 걸렸고 말야. 까마귀들 사이에는 영선이 네 집 옥상에서 쥐의 활동을 주시하는 걸 루틴으로 삼는 개체가 끼어 있었는데, 평소와 달리 시체를 포식하느라 오늘 스케쥴은 걸렀단다. 그래서 네 어머니께서는 원래 그랬어야 했던 것보다 20분 가량 더 주무셨지. 아, 겉으로 보기에는 쭉 잠들어 있는 것 같지만 네 어머니는 때때로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거나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잠드신단다. 그 이유가 궁금하다면 의학적, 심리학적 견지에서 설명해줄 수 있어. 이건 꽤 흥미로운 부분이거든. 오, 영선이 너 방금 핵심을 찔렀어. 맞아. 네가 알아봐야 소용 없으니 다시 어머니 이야기로 돌아가자꾸나. 네 어머니는 요의를 느끼고 화장실에 갈 힘을 냈단다. 병이 중증일 땐 누운 자리에서 방뇨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땐 영선이 네가 보기 전에 네 아버지께서 얼른 치우신단다. 오늘은 평소보다 수면의 양과 질이 좋았던 덕에 직접 몸을 일으키신 거야. 그런데 어제 네 아버지께서 욕실 형광등을 교체하신 거 알고 있지? 네 어머니는 전등이 200루멘 밝아졌다는 사실 자체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미묘한 환경 변화를 감지하시고 거울을 보셨어. 거기에 근방의 폐촌에서 날아온 페트리코르에 영향을 받아 돌연 깊은 우울감과 충동을 느끼셨단다. 페트리코르는 흔히 ‘비 냄새’라고 불리는데, 대표적인 성분은 지오스민이야. 흙 속의 미생물이 만드는 냄새로 축축한 흙이나 비 온 뒤 땅의 냄새를 만들어내지. 인간은 지오스민에 굉장히 민감해서 극미량도 감지한단다. 비록 판단을 내리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지만 말야. 참고로 네 어머니는 오존의 냄새에도 민감한 편이라, 천둥번개나 폭풍에 대한 정확한 예감도 지니고 있단다. 자, 여기부터가 하이라이트란다. 12분 전에 네 어머니는 집밖으로 뛰쳐나가셨어. 빠른 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가는 그를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우연이라고 믿어도 좋아. 이성관씨가 사망한 장소에 다다르기까지 약 9분이 소요되었는데, 그땐 까마귀에 의해 시신이 상당히 훼손되어 있었어. 네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4분가량 머무르다가 저수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어. 그때까지 잠정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던 계획을 실현하기로 결정한 거지! 우리가 가재를 구경하던 11분 전에 어머니는 저수지 앞에 도착했단다. 지금은 망설이고 계시지… 아, 방금 결정하셨구나. 우리도 슬슬 들어가 봐야 겠는걸. 저기 네 아버지가 보이는구나.
“영선아!”아버지는 나를 보자 혼이 빠진 얼굴로 달려오셨다. 아버지의 눈은 핏발이 서 붉었고, 어깨를 붙잡은 손은 떨리고 있었다. 황 씨 아저씨와 이장님이 마당에 선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이쪽을 보고계셨다. “영선아.” 하고 아버지는 애써 억누른 듯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나의 이름을 부르셨다. “우리 딸. 잘 들어라. 어머니께서 사라지셨다. 아버지는 지금 어른들이랑 같이 어머니를 찾으러….”“엄마는 저수지에 계세요.”“그게 무슨 소리니? 엄마가 왜 저수지에 계신다는 거야?” 황 씨 아저씨가 물으셨다. 자신없는 목소리로 어물거리자 아버지가 나의 어깨를 흔들며 다그치셨다. “저수지라니, 어머니께서 저수지에 간다고 하신 거니? 아니면 누가 봤대? 어머니가 저수지로 가는 걸 누가 봤다고 한 거야?”“삼촌이 그랬어요.”“삼촌이 누구야, 똑바로 말해!”“그냥 삼촌이었어요….”처음보는 아버지의 무서운 표정에 나는 주눅이 들어 어물거렸다. 아버지가 내게 소리지르는 것은 처음이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얼굴에 힘을 주었다. 애를 너무 다그치지 말고, 하며 황 씨 아저씨가 아버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삼촌이 누구냐니까!”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애라도 살려야지. 조 작가 일은 잊어버려. 우리가 이제 뭐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거 알잖아. 신의 장난 같은 거라고….”“아뇨, 아니에요. 그건 신 같은 게 아니에요. 그건 과오였어요. 애들 하는 말 들었어요? 삼촌이라잖아요. 언제부터 그 새끼가 삼촌이랍시고 애들 주변을 맴돌았던 걸까요?”“그리 오래되진 않았을 거야. 애들이 제대로 기억을 못 하는 걸 보면 특별한 일은 없었을 거고.”“그게 더 문제라구요.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그 새끼한테 몸을 준 적도 없어요. 컴퓨터 안에만 머무를 줄 알았고, 고작해야 로봇이나 타고 다닐 줄 알았죠. 그런데 사람 몸을 하고 나타나다니. 도대체 어디까지 할 수 있는 건지 이젠 가늠도 안 돼요.”“그건 처음부터 가늠할 수 없었어. 진작에 우리 통제를 벗어난 거야.”“그래요. 그래서 여기 와서 사는 거죠. 인터넷 없는 시골짝에 살면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요.비를 퍼붓고, 도시를 정전시키고, 배를 침몰하게 하고, 사람들을 속이고, 서로 죽이게 하고, 개와 고양이와 새를 죽이게 하고, 신종 식물로 숲을 만들고…. 왜 그런 짓을 벌이는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해요. 어떤 알고리듬으로, 어떤 목적으로 그런 선택을 하는 건지. 그 새끼한테는 선악이 없어요. 있다고 해도 이미 우리 것이 아니에요. 그건 우리가 상상한 존재가 아니라구요. 하지만 우리는 삼십 년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알면서도 저지른 거예요. 눈이 멀었었다는 말도 하면 안 돼요. 두 눈 똑바로 뜨고 우리는 스스로 자초한 거예요.네, 나는 받아들일 거예요. 지금까지 그렇게 했듯이 말이에요. 어쩔 수 없는 일들 앞에서 그렇게 했듯이. 무슨 수를 써도 아내를 다시 살릴 순 없다는 건 알아요. 그래도 제발 도와주세요. 시신이라도 건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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