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의 자살과 사라진 도시

2019 망우동에서
살다 보면 할 말이 있든 없든 떠들어야 할 때가 있다. 사회적인 관습상 그래야 할 때도 있고 순전히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그래야 할 때도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물론 후자다. 전자의 경우는 알 바 아니다. 사회적인 관습에 대해 내가 취하는 태도는 해피밀에 달려오는 장난감을 대할 때와 같다. 보통 정중하게 사양하는 편이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떠들어야 하는 경우란 다음과 같다. 언젠가 나는 사흘 반 정도 회사에 틀어박혀 일해야 했다. 물론 혼자는 아니었고 같이 밤을 지새우는 직장 동료들이 있었다. 그러나 모두 엇비슷하게 바빴기에 꼭 필요한 말 외엔 대화를 주고받진 않았다. 그 대화라는 것도 사내 메신저로 용건만 짧게 나누는 식이었고. 아무튼 나는 정말 바빴다. 며칠이 일에 밀려 이음매 없이 흘러갔다. 낮이고 밤이고 할 것 없이 주유하듯 커피를 들이켰고, 그래도 너무 졸리면 책상에 엎드려 쪽잠을 잤다. 잊을만하면 배달되어오는 샌드위치나 주먹밥 따위를 깨물어가며 컴퓨터와 씨름했다. 일은 전부 컴퓨터가 하고 내 쪽은 자가 충전식 동력원이 된 기분이었다. 사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금요일인가 월요일인가에 겨우 일을 마무리짓고 귀가했다. 때는 한낮이었다. 피로가 기름때처럼 깊게 밴듯한 기분이 들어 일단 욕실로 뛰어들었다. 칫솔을 입에 물고 잡아 뜯듯 옷을 벗어 던져버렸다. 몸에서 떼어낸 옷에서는 따뜻하고 불쾌한 냄새가 났다. 시간과 동작이 서로 잘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무 오랫동안 잠을 자지 않았기 때문에 인지능력이 약간 맛이 가버린 듯했다. 몸을 잡아내리는 중력과 받치는 팔의 힘이 틀어져 태어나 처음으로 팔의 무게를 잴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머릿속에 적힌 샤워의 프로세스를 읽어가며 씻었다. 그러나 그것을 실행하는 내 손의 질량은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빌려온 손을 들고 있는 것처럼. 낯설다. 나는 문득 떠올렸다. 거울을 향해 인상을 힘껏 찌푸렸다 펴보았다. 마사지하는 것처럼 목을 좌우로 꺾으며 두드리고 양쪽 볼에 바람을 넣었다. 거울 속의 나도 미심쩍은 듯 똑같이 했다. 나와 거울 속의 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너머의 것이 의심스럽다는 듯한 눈초리로. 그다음으로 든 생각은 무엇이든 떠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무거나 좋으니 소리 내 말해야 했다. 샴푸로 머리를 감는다거나 스펀지에 물을 적셔 몸을 닦는다는 뻔하고 무의미한 말이라도 좋다. 내가 말하는 것을 내가 들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단 한 번도 스스로에게 해를 가한 적이 없다. 세상에는 뭔가 증명하려는 것처럼 자신을 조금씩 파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그땐 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자칫 방심하면 아주 자연스럽게 스스로 목을 조를 것처럼 느껴졌다. 전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동시에 그렇게 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는 거울을 향해 얼굴을 익살맞게 찡그려 보았다. 과장스럽게 손바닥을 쫙 폈다가 오므리기를 반복했다. 나는 호락호락하게 넘어가 주지 않을 거야. 선 너머의 나를 향해 생각했다. 샴푸를 마저 해야지, 이다음에는 거품을 헹구고 얼굴을 닦아야지, 따위를 떠들어대며 천천히 남은 과정을 해치웠다. 마른 수건으로 꼼꼼히 물기를 닦고 옷을 입었다. 거울 속의 나는 그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날은 실수로 목을 조르지 않도록 조심하며 잠을 잤다.
그러므로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는 것은 상당히 정확한 표현이다. 나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떠들어야 할 때를 놓쳐버린 이를 하나 알고 있다. 그의 이름을 A라고 하자. 물론 그에게도 A보다 훌륭한 이름이 있었다. 그것을 밝혀도 될지 확신할 수 없을 뿐이다. A는 그다지 친하진 않지만 오래 알고 지내온 친구 중 하나로서, 무던하고 평판이 좋았다. ‘무던하고 평판이 좋다’는 A라는 인간의 단면 중 대표적인 특질이었다. 누구나 그를 그렇게 알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안위를 늘 뒷전에 두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어디에나 자신을 쉽게 끼워 맞추고 큰 불만 없이 살았다. 그것은 일종의 재능이자 저주였다. 사람은 언제나 불만족한다. 거위 털을 채운 이불에 눕혀 과자와 주스를 먹이고 살랑살랑 부채질을 해줘도 완전히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반면 A는 모든 일에 기계적으로 만족을 표했다. 식사는 맛있게 했냐는 종업원의 질문에 반사적으로 웃음을 띄우는 것처럼. 게다가 그에게는 어딘가 흐릿한 구석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은 여기서 사람이란 누구나 흐릿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투명도에 대한 부분이다. 누구나 뿌연 입김이 서린 창문처럼 흐릿한 부분을 갖는다. 그리고 그것은 보통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교묘하게 숨어 있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를 아는 못생긴 개처럼. 그러나 거리가 가까워지고 마음이 열리면 흐릿한 창문 뒤에 어슬렁거리는 그림자를 분간할 수 있게 된다. 어느 날 문득 친구가 풍기는 가난의 냄새를 맡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A는 극도로 흐릿한 인간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A가 어떤 사회적 상호작용도 용납하지 않는 돌덩어리 같은 인간처럼 비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연히도 그런 것은 아니다. 그는 대체로 상냥하고 친절했다. 머리도 좋았고 됨됨이도 바른 편이었다. 교우관계도 원만했다. 그러나 A의 흐릿함은 그 정도가 너무나 두터워, 그와 어느 정도의 거리에 있든 결코 그 너머를 알 수 없었다. 그는 상대방을 속이는 데 이골이 나 있었다. 그는 일상적으로 즐거운 척했고, 몰입한 척했다. 여자친구를 사귀고 약간 중독된 것처럼 게임을 하고 몸을 단련했다. 보통의 남자애들이 십 대를 보내는 방식대로. 그러나 그는, 사실 주변에서 제안하는 그 어떤 일에도 관심이 없었다. 즐겁지 않았고 몰입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았다. 그저 그런 척 한 것뿐이다. 그것이 평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조금 경멸했다. 티 나지 않을 정도로 약간만. 때때로 같이 어울렸지만 혼자 있을 땐 절대로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여럿이 어울릴 때도 은근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나와 직접 말을 섞지 않았다. 우리가 다른 종류의 인간이었다면 팔 년이나 십 일 년쯤 뒤에 싸구려 술을 잔뜩 마시고 사실은 두려워서 그랬어, 하며 털어버렸을 수도 있는 이야기이다. 나와 너무 닮아서 그게 두려웠어.
그는 대학에서 회계세무학이던가 경영학이던가를 배우고 그대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녹록지 않은 일 년여를 보낸 다음 무사히 어떤 대기업에 안착했다. 운 좋은 민들레 홀씨처럼.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회사였고 월급도 썩 괜찮았다. 무슨 일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느 날 그에게도 무작정 떠들어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는 먹기 싫은 음식을 먹듯이 그것을 참아버렸다. 출근길의 지하철이었고, 시간 여유는 없었다. 그가 말하기로는 땅이 일어나 눈앞에 선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일순 조용해지더니 사람들이 한참 멀찍이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점점 빠르게 다가오며 일직선으로 귀에 파고들었다.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어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잠시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밖으로 나가 차가운 공기를 좀 마시고 얼굴과 겨드랑이 밑을 씻은 다음 돌아와야겠다고. 지하철을 몇 대 보내면 사람도 적어져 훨씬 쾌적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차를 타고 그대로 가도 아홉 시 십 분 전에 겨우 자리에 앉을 수 있다. 잠시 나갔다 오면 분명 십오 분쯤 늦고 말 것이다. 저번 주에 이미 한 번 지각을 했다. 또 그러기엔 면목이 없다. 이명 같은 것도 가라앉았으니 잠깐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런 식으로 그 순간을 참아냈다. 그것이 처음이었다. 그다음 찾아온 순간도 꿀꺽 삼키고, 그다음도 꿀꺽 삼켜버렸다. 어지러움이 찾아오면 지하철 문 옆의 구석에 숨어 고개를 숙이고 숨을 길게 쉬었다. 다행히도 그는 늘 괜찮아졌다. 컨디션은 좋지 않았지만 일단 회사에 출근해 일하다 보면 아침의 일은 까맣게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문 옆 모서리에 몸을 숨기고 있는 동안 어딘가로 조금씩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것은 알아차릴 수 없었다.
나를 만났을 때 그는 이미 상당히 마모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비둘기 모양으로 마모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비둘기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본질 깊숙한 부분은 비둘기며 그것은 결코 바뀔 수 없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것으로 불가해한 모든 일이 설명된다고 믿었다. 우리는 점심시간에 만나 함께 돈까스를 먹었다. 식탁에 앉아 한참 동안이나 같은 거리에 있는 회사에 다녔는데도 여태껏 모르고 살았던 것에 대해 한마디씩 했다. 돈까스가 튀겨지는 동안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회사 일이 힘들다느니, 주식을 해야 할 텐데 여윳돈이 없다느니. 그는 왠지 평소와 달라 보였다. 평소와 비교하기에 나와 그는 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사이였지만 ,확실히 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묘한 말투를 썼고 거리감도 느슨했다. 무심코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대강 대화의 모양새를 갖추었으나 주제가 심하게 겉돌았다. 이야기의 디테일이 조금만 자세해져도 화제를 금방 바꿔버렸다. 나는 그가 나를 은근히 경멸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시간이 많이 흐른 탓에 깜박하고 식탁에 함께 앉았지만 나와 나눌 얘기는 없을 것이었다. 대강 피상적인 대화를 좀 나누며 돈까스를 위에 밀어 넣고 다시는 연락하지 않을 작정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기에 그는 나를 너무 반가워했다. 오랜만에 주인을 만난 강아지처럼 신이 난 상태였다. 애초에 점심을 함께 먹자며 불러낸 것도 그쪽이었다. 나는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갓 튀긴 돈까스를 우물우물 씹었다. 나는 비둘기니까,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알다시피 나는 결국엔 비둘기일 테니까 회사에 잘 적응할 수가 없어. 그러고보니 벌써 연 날릴 때가 됐네. 전압기를 조심해야 할 텐데. 그는 이런 식으로 말했다. 요즘 유행하는 말이라든가 일에 관련한 용어인가 싶어 몇 번이고 다시 물어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비둘기라고 생각했다. 간단한 일도 조리 있게 설명하지 못했지만 자신이 비둘기라는 주장은 변함없었다. 심지어 비교적 앞뒤가 맞았다. 나는 캐묻기를 포기하고 내 접시의 돈까스를 쓱쓱 썰어 먹었다. 그리고 헤어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일 킬로그램짜리 쌀 한 봉지를 사주었다. 그는 어리숙한 얼굴로 웃으며 그것을 받아갔다. 고마워, 내 생각해주는 건 그래도 너뿐이네. 나도 그냥 그에게 웃어 보였다.
그가 자살한 뒤 나는 그의 집을 치워주었다. 망우로 2길 18. 작은 오피스텔 건물의 3층 첫 번째 방. 그가 학생 때부터 살던 집이었다. 그는 죽기 전 내게 메시지를 남겼다. 그것은 ‘요즘 들어 부쩍 발목이 아파’부터 시작해 ‘집을 좀 치워줬으면 좋겠어,’ 로 끝났다. 문장도 맞춤법도 제대로 된 것이었지만 상당히 횡설수설했고 주제도 없었다. 뭔가 분명하게 말하려는 것은 마지막의 ‘집을 좀 치워줬으면 좋겠어,’ 뿐이었다. 그것만은 정말로 확실히 바랐던 듯 몇 줄을 사이에 두고 집 주소와 비밀번호까지 적혀 있었다. 마침 쉬는 날이었기에 나는 즉시 그의 집으로 향했다. 답장은 하지 않았다. 부탁을 들어줄 것을 알면 그가 어떤 짓을 저지를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의 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피스텔의 빌트인 가구를 제외하면 텅 빈 상자와 다를 바 없을 지경이었다. 욕실과 싱크대도 물 자국 하나 없이 말라 있었고 모든 스위치가 내려간 상태였다. 나는 옷장과 침대 밑 서랍을 열어보고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우편함 가득 꽂혀 있던 고지서들을 보아 그의 집은 확실했지만 그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뭔가 해야 할 것 같았으나 뭘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문득 냉장고의 냉각기가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나는 자그마한 냉장고로 다가가 문을 열어보았다. 냉장고의 채소칸엔 담배가 한 갑 들어있었다. 왜 담배를 남겨 두었을까? 어쩌면 담배를 냉장고에 넣어 차갑게 피우는 것이 취향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아서 잘 알 수 없었다. 담뱃갑은 단정했지만, 새 것은 아닌지 비닐 포장이 뜯겨 있었다. 나는 그것을 집어 열어보았다. 열 아홉 개비의 담배 사이에 돌돌 말린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이제 그만두려고 해.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 너는 이해하지? 사람도 도넛도 어떻게 보면 하나짜리 구멍이잖아.
담뱃대 모양으로 돌돌 말린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경찰을 이해시킬 수는 없었다. 나조차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건 확실했지만 그것조차 경찰에게 납득시킬 수는 없었다. 수화기 너머의 남자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친구분 성함이 뭔데요?’ 라고 말했다. 나는 순간 울컥해 찾아줄 것도 아니면서 뭐하러 묻느냐고 쏘아붙이려 하다 그냥 전화를 끊었다. 그저 형식적으로 이름을 물어보고, 확인할 수 없는 약속을 하고, 그렇게 만족시킨 다음 모든 것을 끝내버릴 것 같았다. 그의 계획에 동참해주기는 싫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집을 뒤져보았다. 가족이나 여자친구의 전화번호가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았다. 다시 생각해보면 요즘 세상에 전화번호를 종이에 적어 서랍에 넣어두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왠지 그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의미 없이 중얼거리며 매트리스를 뒤집었다. 그냥 떠오르는 것은 무엇이든 발음해보았다. 매트리스 밑에는 없어, 샤워기를 틀어봐야지, 화장지가 있을까? 아무것도 없는 조그만 오피스텔을 샅샅이 뒤지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눈에 띄는 것은 모조리 안팎을 뒤집어보았지만 찾아낼 수 있던 것은 먼지뿐이었다. 그의 시체는 며칠 뒤 옥상에서 발견되었다. 며칠 전 친구의 집 주소를 대며 전화를 건 까닭으로 나는 경찰에 불려가야 했다. 사인이 너무도 명백하게 자살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에 괜한 의심을 받는 일은 없었다. 단지 몇 가지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부른 거라며 경찰은 종이컵에 담긴 녹차를 내주었다. 나를 가느다란 철제 의자에 앉혀두고 경찰은 파일철에 고개를 처박았다. 몇 가지 형식적인 질문을 건네며 대답을 받아적었다. 느리고 강한 타이핑소리가 잘못된 빗방울처럼 떨어졌다. 최근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느냐는 질문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며칠 전 아주 오랜만에 우연히 만나 점심을 함께했노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대답은 어쩐지 무언가를 회피하는 것처럼 들렸다. 경찰은 파일철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더니 뻐근하다는 듯 목을 주물럭거렸다. 이렇게까지 징후가 없는 경우도 없어요. 회사 생활도 잘하셨고, 능력도 인정받는 축이었어요. 보통 그런 경우엔 집이 엉망인데, 공과금 한 번 밀린 적이 없어요. 쓰레기를 쌓아 두지도 않고요. 애인 관계도 깨끗하고 정신과 진료 기록도 없네요. 조서를 꾸며야 하는데 도저히 쓸 말이 없어요. 한참을 의미 없는 질문을 던지다가 경찰은 이제 됐다는 듯 내게 집에 가도 좋다고 말했다. 협조해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악수를 건넸지만 그의 표정에는 여전히 의문이 가득했다. 나는 코트를 집어 들고 짐을 챙겨 일어섰다. 철제 의자의 가느다란 다리가 바닥을 긁으며 소리를 냈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문을 향해 뒤를 돌았다. 그런데 왜 옥상까지 올라가서 굳이 목을 맸을까,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한참 뒤 횡단보도를 건널 일이 있었다.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횡단보도였다. 나도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목적을 위해 그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이었다. 한참이나 신호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비둘기 한 마리가 고개를 흔들며 다가와 옆에 섰다. 늦은 오후의 태양이 느긋한 햇살을 보내는 겨울날이었다. 정지 신호를 받은 버스가 슬금슬금 다가와 횡단보도 옆에 코를 댔다. 차창 유리 너머로 멍하니 앉은 승객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나와 비둘기가 어떤 연극의 소품이라도 된다는 듯 물끄러미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보행자 신호가 켜지고 나는 횡단보도를 향해 왼발을 뻗었다. 비둘기도 기다렸다는 듯 길을 건넜다. 너는 날면 되잖아,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비둘기는 중간에 멈추었다. 영문 모를 바다에 떨어진 섬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그대로 서버렸다. 나는 길을 끝까지 건너고 왼쪽으로 돌면서 몇 번 남지 않은 초록색 신호를 속으로 헤아렸다. 비둘기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이따금씩 몸을 푸르르 떨면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듯 신호등이 급하게 깜박였다. 비둘기의 모습을 시야에 넣은 채 걸음을 계속했다. 멈춰있던 차들이 시동을 넣고 천천히 움직였다. 나는 모퉁이를 만났다. 비둘기가 결국 어쩌기로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비둘기의 비명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후 우연한 기회를 잡아 나는 도시를 떠났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기회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훨씬 적게 벌고 생활도 간소해질 예정이었다. 회사 규모를 줄이고 분할하는 과정에 자원한 것이다. 일단 회사에 소속되어있기는 하나 프리랜서에 가까운 일이었고, 사실상 좌천이나 다름없었다. 말하자면 모두 꺼릴 만한 일이었다. 그 대가로 괜찮은 보너스를 탔다. 필요 없는 짐을 덜어내니 트럭 없이도 직접 옮길 수 있을 것 같아 차를 하나 샀다. 어차피 도시를 떠나면 차가 꼭 필요해질 것이기도 했다. 뒷좌석을 젖혀 짐을 밀어 넣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도시를 벗어날수록 유년기의 치열처럼 건물이 듬성듬성 사라졌다. 교외의 아파트 단지가 끝나니 대형창고와 공장이 이어졌다. 오래된 패션 화보가 붙어있는 광고판이 이따금씩 튀어나왔다. 한 시간쯤 달리니 어느새 밭이 펼쳐졌다. 보리농사가 한창인 듯 파랬다. 휴게소에 들러 점심으로 우동을 먹었다. 삼십 분 정도 더 달리면 새로운 집에 짐을 넣을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하늘을 향해 입을 크게 벌리고 얼굴 근육을 풀어보았다. 아이스커피를 사서 한 모금 힘껏 빨았다. 기지개를 켜고 다시 운전석에 앉았다. 길을 따라 송전탑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 보였다. 송전탑 사이사이로 주름처럼 늘어진 전선에 공 같은 것이 매달려 있었다. 분명히 어떤 기능이 있는 공일텐데, 알 수는 없었다. 나는 어깨를 뒤로 젖히고 핸들을 잡았다. 점퍼 주머니 속의 담뱃갑이 복부를 찔렀다. 열 아홉 개비가 들어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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