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사막의 집

소설도 아니고 일기도 아닌 글쪼가리를 자주 써둡니다. 언젠가 이야기가 될 지도?

그 집은 사구 위에 떠 있다. 마치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관이나 식당은 아니지만, 그래서 결코 손님을 기다리지는 않지만 찾아오는 이를 박대하지는 않는다. 집주인은 손님에게 물과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며, 원하는 만큼 머물도록 해준다. 척박한 사막 위에 홀로 서 있는 집이니만큼 부자는 아니고, 따라서 객은 융숭한 대접을 기대해선 안 된다. 객이 사막 밖에서 어떤 사람이었든 그 집은 사막에 있다. 사막에게 당신은 45리터의 탁한 물을 담은 물주머니에 불과하다. 그 희박한 자원을 몸에 담았다 배출하는 식으로 살아가는, 불가해한 살덩어리. 그렇다. 당신에게 사막이 그러하듯 사막에게도 당신은 불가해하다. 당신은 걷는다. 뼈와 근육과 힘줄과 신경과 체액과 살과 가죽으로 이루어진 다리를 모래에 푹푹 파묻어가며. 평범한 사막의 풍경이다. 주변에는 모래 뿐이다. 모든 것이 모래로 이루어져 있다. 땅과 바닥과 산, 심지어 공기도. 모래와 구별되는 유일한 것은 하늘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 편이 아니다. 역시 모래로 이루어진 지평선을 향해 당신은 걸음을 옮겨야 한다. 어디로도 갈 수 없기 때문에 어디든 가야 한다. 어디든 가야 하는 탓에 어디로도 갈 수가 없다. 그것이 사막의 논리체계다. 모든 걸음은 무의미한 동작이다. 아무것도 가까워지거나 멀어지지 않기에, 이동은 근육의 혹사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나 사막에도 밤은 찾아온다. 해가 당신에게 질려(당신은 그저 걷고 있을 뿐이니까) 모래로 이루어진 지평선 아래로 자러 가면, 밤은 별의 군단을 이끌고 찾아온다. 밤의 추종자들 -추위와 밤이슬은 그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당신의 몸을 사용한다. 당신은 떤다. 이를 부딪힌다. 차가워진 팔뚝을 문질러 열을 내려 한다. 종일 걸어온 허벅지와 종아리의 근육은 이제 돌처럼 묵직하다. 사막에는 물론 그런 건 없지만. 당신의 소화기관은 굳었다. 운 좋게 아직 음식이 좀 남아 있다면 그것으로 소화기관을 일하게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럼 열이 나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당신에겐 지친 몸 밖에 없고, 그것은 돌처럼(사막에는 물론 그런 건 없지만) 차가워지고 있다. 걸음은 느리다. 느려졌다. 이젠 더 걸을 수가 없어. 하고 당신은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모래에 파묻힌 발을 들어올리고 한 걸음 앞으로 움직여 찔러넣는다-모래가 당신의 종아리를 삼킨다. “이젠 더 걸을 수 없어.”당신의 말을 당신의 몸이 부정한다. 사막에서 그 둘은 엇갈린 운명을 지닌다. 말과 몸이 결국 일치할 때, 한 쪽은 그 자리에 없을 것이다. 그런 당신을 아까부터 지켜보는 이가 있다. 그는 망원경도 없이, 사구 위에 홀로 서서, 밤의 사막을 가로지르는 무모한 발걸음을 세고 있다. 혹시 알고 계시는지? 밤의 사막은 침묵보다도 고요하다. 얼어붙은 은빛 모래는 마치 얼음같아서, 당신의 발소리는 아주 멀리까지 들린다. 어쩌면 그 소리가 집주인의 잠을 조금 일찍 깨웠을지도 모른다. 어떤 시점에서 보면 당신은 조금씩 커지고 있다. 바늘 끝만큼 작았던 존재감은 사락사락 자라 어느새 포도알만한 크기로, 손가방만한 크기로, 의심과 환희로 찬 만한 물주머니만한 크기로, 그러니까 45리터의 탁한 물을 담은 살덩어리만한 크기로 불어나 좀 있으면 뼈와 살과 털로 이루어진 1미터 64센티미터의 어깨가 좁은 여자가 될 예정이며, 그 여자는 마지막 남은 힘으로 한 그릇의 구원을 청할 것이고 집주인은 자기 발치에 엎어진 사람을 외면할 만큼 박정하지는 않은 사람이지만 그는 지금 당신에게 별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당신이 아주 천천히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여느 날과 같은 아침을 맞이한다. 매일의 집안일을 하나씩 해치운다. 밤 사이 바람이 흩뿌려놓은 모래를 마루 밖으로 몰아내고, 사막 양의 젖을 짠다. 모래의 무게에 지붕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비를 머리위로 뻗어 휘두른다. 우물 위에 걸어두었던 뒤집은 고깔 모양의 양가죽 천막을 살핀다. 귀한 물을 낭비하지 않으려 애쓰며, 한 잔의 차를 끓인다. 그러는 동안에도 당신은 걷고 있다는 사실을 집주인은 알고 있다. 그러는 동안에도 당신은 걷고 있다. 거의 잠든 채, 마치 물 속을 걷는 기분으로. 마침내 해가 사구 위로 솟아오를 것이다. 눈알을 베어내는 한 줄기의 빛이 당신의 신경을 깨울 것이다. 더는 걸을 수 없다고 여든 네 번째로 생각할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당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고, 다리의 고통이 그 사실을 보증해줄 것이고, 차라리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구 위에서 지붕은 평행사변형의 빛을 번쩍일 것이다. 인간은 얼마나 기하학적인 것을 갈망하는지!요컨대 발견의 순간은 늘 일출과 동일하다. 당신은 의심과 희망과 절망과 환희를 심장의 네 부위에 각각 품은 채 난생 처음으로 뚜렷한 목표를 지니고 그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기게 된다. 그 무렵에는 집주인도 모래를 비벼 닦던 그릇을 엎어두고(그것은 나중에 젖은 행주로 한 번 더 깨끗이 닦일 것이다) 당신을 마중하기 위해 대문가로 향하고 있다. 물그릇 하나와 낙타 젖 섞은 술 한 잔-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다. 당신이 대문가에 도달할 시간도 안다. 그는 잘 보기 위해 눈을 찌푸린다. 아주 가끔은 조금 멀리까지 마중나가야 하는 일도 있지만, 이를테면 모래 밑에서 도사리고 있던 전갈이 다가오던 객의 다리를 물어버린다거나, 당신은 비교적 멀쩡해보인다. 아마 제정신도 남아 있을 것이다. 눈과 입이 벌어진 까닭은 환각이 아닌 극심한 피로 탓이다. 정말로 환각이 아닌 걸까? 당신은 의심하고 있다. 당신은 의심이 많은 성격이다. 사막 한복판에 나타난, 깨끗한 옷을 입은 사람. 그런 사람들이 풍기는 묘하게 갓 만들어진 듯한 분위기에 경도되어 있기도 하다. 집주인의 이목구비를 분간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을 땐 그 온화한 표정을 보고 의심의 대상을 바꾼다. 나는 살아있는 걸까? 그 질문은 온몸을 움켜쥔 피로에 의해 즉각 반박된다. 당신은 대문 앞에 엎어져 집주인의 발목을 더듬는다. 할 말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원하는 것이 물인지, 삶인지, 아니면 죽음의 처치인지. 집주인은 사막의 주민답게 노련하다. 차가운 질그릇을 넘겨 받은 당신은 생물적 본성으로 삶을 선택한다. 당신은 물을 마신다. 한 방울도 남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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